권석천, '사람에 대한 예의'
p.198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은 미혼모 동백(공효진)이 옹산이란 지역 공동체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이루는지 이야기한다. 특히 한 장면이 인상에 남는다. 아이 아버지인 프로야구 선수 종렬(김지석)이 동백에게 찾아와 "세상에 알려지면 아이에게 '혼외자' 딱지가 붙는다"며 미국에 가라고 말한다. 동백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나는 남이 불편할까 봐 나를 낮췄고 붙어보기도 전에 도망치는 게 편했다.
근데 이제 그냥 하찮아지는 니 불편한 사람이 돼보기로 했다.
동백은 종렬에게 답한다.
도망치는 사람한테 비상구는 없어. 나 다신 도망 안 가.
그러니까 니들 다 진짜 까불지 마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동백은 취객이 무서워서 지나가지 못했던 굴다리를 홀로 걷는다. 고주망태가 된 취객이 술주정을 하자 '아직은 싸울 때도 존댓말이 나오지만 그래도 붙어는 본다'며 떨리는 목소리를 낸다.
"아저씨. 정신을 챙기고 사셔야 합니다! 제가 만만해요? 예? 사람을 봐가면서 까부셔야 하는 게 좋겠어요."
어디를 가나 '까불이'들은 있다. 그 까불이들과 공존해야 하는 세상에서 남이 불편할까 봐 나를 낮추는 것도, 붙어보기도 전에 도망치는 것도 정답이 아니다. "니들 다 까불지 마라."하고 외치고, "사람 봐가면서 까부시라"라고 말해야 한다. 비록 목소리는 바르르 떨리고, 다리는 후들거리더라도.
이러한 동백의 각성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그에겐 자신만의 원칙이 있었다. 술집을 운영하면서 "저는 술만 팔아요. 이 안에서 살 수 있는 건 딱 술, 술뿐이에요"라고 말한다. 또 "노 머니에 노 서비스가 아니라, 노 매너에 노 서비스"라고 강조한다. 동백은 "앞으로 제 인생 모토"라며 하나 더 붙인다. "반말하면 나도 반말."
+ 중략

"여러분이 나아갈 사회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나쁜 일'이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스스로를 하찮게 여겨서 그런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니까요. 차라리 불편한 사람이 되십시오.
불편한 사람이 된다는 건 다시 말해서 자신만의 원칙을 가지고 산다는 뜻입니다. 원칙이 없으면 여러분에게 지시를 내리는 사람도 편하게 느끼겠지요. 원칙을 지키다 보면 여러분 생활이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회사에서 해고되진 않을 겁니다. 우리 사회가 그 정도는 아닐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오히려 빛나는 경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불편해지겠다는 각오만 있다면 여러분이 그 어려움들을 돌파해내리라 믿습니다."
+ 중략
"본인의 캐릭터를 '할 말은 하는 사람'으로 잡으면 돼요. 일단 캐릭터를 그렇게 잡으면 누구든 쉽게 어떻게 못 해요. 아, 물론 사장되고, 부사장 되기는 어렵겠죠. 그래도 어느 정도까지는 올라갈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겁날 게 없어요."
그는 대기업 부장으로 있다고 했다. 어느 곳에나 현자는 있다. 어쩌면 그런 사람이 있기에 이 사회가 그 많은 모순 속에서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분명한 자기 기준이다. 자기 기준이 있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아무리 힘 있는 사람이 뭐라고 압박해도, 나 자신의 욕망이 뭐라고 유혹해도, 때로는 흔들리면서도, 가야 할 길을 간다. 중간에 경로를 이탈하더라도 내비게이션이 다시 경로를 재설정하듯이, 자기 기준만 잃지 않으면 끝내 목적지에 도착한다.
+

자기 기준을 산다는 게 쉽겠냐고? 물론 쉽지도 않지만 그렇게 어렵지도 않다. 어려운 일일수록 가벼운 마음으로 하는 게 중요하다. 진지하게 고민하되 일단 결정하고 나면, 내가 잘못한 게 없다고 판단되면 뒷일 걱정하지 말고 '정말 가볍게' 갈 길을 가는 거다.
쫄지 마라. 쫄지 마. 쪼니까 만만하지. 쪼니까 만만하고 쪼니까 하찮아지는 거다.
- 동백이 엄마(이정은) 대사 中 -
신입 사원부터 10년 이상을 모나지 않고, 순응(?)하려 노력했던 그 시간이 내가 가장 후회하는 시간이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라는 말을 싫어한다. 아파야 성숙하는 거라면, 아프지 않고, 마냥 철없이 살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 갖고 있었다.
10년 이상의 장기적인 관점에서 '나의 원칙을 갖는다'는 명언이고, 진리라고 느껴진다. 하지만 내가 그때 그 신입이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지금 이 책의 이 구절이 와 닿지 않았을 것이다.
불편한 사람으로 산다는 건 생각보다 더 어렵다. 지금보다도 더 센 조직 문화를 자랑하던 시절에 자신의 원칙을 지킨 사람은 모난 사람으로 보이는 것 외에도 인사이동에 불이익(?)도 감수해야 했다. 힘든 길을 사서 걸어야 하는 순간을 목격하기도 그리고 나의 심약한 마음은 동백이처럼 용기를 낼 엄두도 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최근 몇 년 전부터 결심은 아니었지만 나이 탓인지, 아니면 어떤 깨달음이 스스로 찾아왔는지 나의 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하는 장면이 생겼다. 공연히 나설 필요는 없지만 '거부'의 의사표시는 필요에 따라서 해야 함을 알았다.
수많은 처세술 책에서는 말한다. '적을 만들지 말라'고!
나도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그동안 온갖 피곤함을, 억울하기까지 한 마음을 오래 눌러왔다. 거부와 반대를 쉽게 넘기는 사람도 있지만, '거부=적'으로 인식하는 까불이들이 회사에는 그리고 세상에는 엄연히 존재한다. 그래서 거부하는 순간, 상대방을 '적'으로 만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나를 쫄게 한다.
그때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네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쫄지 마! 한 번 거부한다고, 나를 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언젠가 '적'이 되더라.
그냥 적이 되는 그 시간이 좀 더 앞당겨졌을 뿐이야.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본인과 생각이 다른 사람은 모두 적으로 만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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