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밖으로 드러난 진실

by 그럼에도

부산에서 집을 구하면서 고려하지 못했던 점이 있다.


그건 '물, 배수상태'였다. 사실 물이 차는 걸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어렸을 때 살아온 지방의 작은 동네는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 아니었다. 그러니 물이 차오르는 현상을 본 적 없었고 서울에 올라와서도 운 좋게 물이 고이지 않는 동네에 살았다.


부산에 어느 날 비가 엄청나게 내렸다. 낯선 도시에서 많은 비는 낯선 감정을 일으킨다. 그렇게 불청객이 온 듯한 비가 내리고 아침이 밝았다.


창문을 열고 잤더니 익숙한 테니스 공과 라켓의 충돌음이 들린다. 어제 비가 많이 왔었는데 법원 테니스장에 테니스공과 라켓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밤새 내리던 비가 그쳤나 보다.


눈을 뜨자마자 아침 뉴스를 보다가 충격에 빠졌다. 초량지하차도를 지나던 차에 있던 사람이 불어난 물에 갇혀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초량지하차도는 내가 사는 주변 동네에서 부산역을 갈 때 꼭 거쳐가야 하는 필수 경로였다. 나 역시도 하루 전 날 초량지하차도를 통과하는 경로로 운전했다. 그런 일상적인 장소가 사건의 배경이라니...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물난리가 난 초량지하차도 뉴스와 아파트 아래 바삭하게 마른 모래밭 테니스장에서 들리는 라켓소리가 합쳐진 소리가 귀에 들린다. 이건 흰색과 검은색의 대비처럼 너무나 다른 세상이었다. 때마침 친구들의 안부 인사가 카톡에 울렸다.


가슴이 먹먹하던 그때 친구들 이름에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어찌나 고마운지.


카톡을 열어보고 '여기는 물난리 피해 없이 잘 지나갔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가장 친했던 20년 지기의 이상한 답변이 날아왔다. '다행이다'라는 답변 대신 '왜 너만 피해가 없는지? 부산에는 물난리가 심하다던데, 진짜 물난리가 없는지?'라는 알 수 없는 질문이 연이어 올라왔다.


부산이라는 도시 크기를 친구가 사는 동네 아파트단지 크기로 착각하는 걸까?


'왜 너는 피해가 없냐?'라는 말에 순간 충격에 빠졌다. 어려울 때면 함께하던 친구는 내가 어려웠던 상황을 재밌어했던 걸까? 오랜 친구에 대한 환상이 얇아지고, 친구들의 이야기를 차갑게 다시 읽어봤다.


아무도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걱정처럼 보낸 안부 인사에서 '피해가 없다'는 말에 아무도 안도하지 않았다. 언론에 나온 뉴스와 다르다는 것에 이해할 수 없다는 너희들.


그렇게 부산 생활은 완벽한 혼자가 되는 시간이었다. 친하다는 착각.


'망하고 나면 인간관계가 다시 보인다'라고 했던 사장님들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난 사업을 해본 적은 없지만 부산에 온 다면 '인간관계'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를 둘러싼 환경 중에 제대로 된 것은 없었다. 오랜 시간과 에너지, 경조사비, 만남을 지속하기 위한 그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었음을 증명한 부산행.


얼마나 만만한 사람, 당연한 사람이었는지를 너무 늦게, 너무 새롭게 발견했던 부산행. 그래서 부산행은 지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새로운 2막의 시작이었다. 이 고통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keyword
이전 04화낯선 도시에 적응하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