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을 받으면서 마시기 시작한 커피였다.
커피는 맛과 향을 위해서 마시는 음료가 아닌 '노동 필수품'이었다. 졸린 아침을 깨워주는 생명수였고, 일상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보호 장비였다.
오후부터는 커피를 가급적 마시지 않는다. 커피 한 잔의 카페인은 밤새 뜬 눈으로 보내야 할 만큼 나에게는 강력한 흔적을 남긴다. 그런 커피를 어느새 하루에 3잔을 마시고 있다. 누군가가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는 것처럼 나는 내일의 에너지를 오늘에 끌어다 쓰고 있는 것이다.
처음 커피를 마시던 그때의 나는 말도 안 되는 회식에 말도 안 되게 많은 횟수를 참석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팀워크'를 운운했지만 한참을 지나고 그때 팀장님의 나이가 돼 보니 더 잘 보였다. 기러기 아빠의 신세한탄, 취미 부족, 외로움이 깊어져서 만든 소모임이었다는 것을.
새벽까지 이어진 자리,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괜찮은 척 버티던 나, 돌아온 아침 알람 소리를 버티게 해주는 건 박카스였다. 나는 늘 아침에 달달한 박카스 한 병을 마시면서 움직일 힘을 찾았다. 그런데 동기 녀석이 그렇게 매일 마시는 박카스에 쓴소리를 날렸다.
들어보니, 정말 매일 마셔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처음에 달달한 라테였다가 어느새 쓰디쓴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그러다 '샷 추가'를 해서 한약 맛 나는 아메리카노를 완성했다. 한 잔으로 그날을 버텼다.
팀장이 바뀌고 전처럼 늦은 회식을 하는 일은 없어졌다. 그럼에도 달라지지 않은 것은 새벽 늦게 잠드는 불량한 일상이었다. 하루에 있던 온갖 슬프거나, 아프거나, 그냥 그랬던 일들이 뭉게구름처럼 몰려왔다.
그런 뭉게구름에 쌓여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친한 친구나 지인에게 말도 안 되는 슬픔을 털어놓았다. 요새 말로 감정쓰레기통으로...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다.
나 역시 과거 팀장처럼 외로웠고, 신세한탄이고, 취미가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게 별로인 시간은 오래 보냈다. 시간이 흘러 흘러 취미도 생겼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마음도 생겼다.
다만 잠을 늦게 자는 버릇은 여전했다. '잠'에 관련한 김경일 교수님 특강을 듣다가 발견했다. 나의 예민, 우울과 불안의 가장 큰 원인은 잠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잠이 많았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억지로 줄여온 잠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오늘은 날씨 좋은 황금 토요일,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을 푹 잤다. 그리고 눈 뜨자마자 마시던 커피를 찾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하루가 멍하고, 오후에는 나른함과 더불어 두통에 시달렸다. 카페인 금단 증세가 시작된 것이다.
언제나 다양한 일들을 벌릴 생각만 하고, 어떤 것은 줄여야 할지를 정하지 못했다. 의욕과다가 부른 결과는 언제나 초라했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이제 그만 엉망진창인 나를 구하고 싶었다. 진짜 건강하고 단단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