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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떡 Oct 19. 2021

나를 입증하는 법

중학교에 입학하고 진단고사를 쳤다. 주요 5과목이라고 부르는,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시험이었다. 생각보다는 시험이 어렵지 않았다. 결과야 어쨌든 시험이 끝나서 홀가분했다. 친구들과 자리에 앉아 떠들고 있는데, 학급 서기를 맡은 친구가 나를 불렀다. 너, 담임 선생님이 교무실로 오래.


무슨 일로 부르셨을까? 내가 뭘 잘못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막연한 불안함을 안고 교무실로 향했다. 교무실에 가는 건 처음이었다. 두리번거리며 담임 선생님 자리를 찾았다. 선생님은 나를 쓱 보더니 말씀하셨다. “너 이번에 시험 잘 봤더라. 다섯 과목 전체에서 세 개 밖에 안 틀렸어. 반 1등이야.”


네? 제가 1등이라고요? 1등? 내가 1등이라니. 흐흐흐. 안 웃으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절로 나왔다. 순간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행복의 순간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바로 선생님의 물음이 이어졌다.


"너 혹시 커닝했니?"


선생님의 목소리는 작지만 카랑카랑하고 공격적이었다. 커닝이라니. 공중으로 붕 떠올랐던 몸이 바닥으로 훅 내쳐지는 기분이었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면서 대답했다. “아, 아닌데요. 저 커닝 안 했는데요….”


우리 반에 나와 동점자가 있다고 했다. 그 친구는 입학 전 반배치고사도 잘 본 친구였는데, 그에 비해 나의 반배치고사 성적은 낮은 편이었단다. 게다가 시험 당일 자리 배치는 번호순이었는데, 내가 그 친구 대각선 뒤에 앉아있었다. 정황상 내가 커닝했다고 의심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다행히 과목별 세부 점수가 나오면서 나는 의심을 벗을 수 있었다. 그 친구는 영어를 제외한 과목에서 1개씩 틀렸는데, 나는 3문제를 다 영어에서만 틀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음이 불편했다. 의심받았다는 것 자체가 상처로 남았다. 담임 선생님이 보기에 그 친구의 성적은 실력이었지만, 내 성적은 운이 좋았던 거라고 여겨지는 듯했다.


다시는 그런 상황에 놓이고 싶지 않았다. 나도 내 실력을 입증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의 공부가 시작됐다. 1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앞둔 시점이었다.


안타깝게도 중간고사에서 나의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학급 아이들 전체 성적표를 교실 앞 게시판에 게시하던 시절이었다. 진단고사에서 나와 동점인 친구는 이번에도 1등이었다. 그 친구의 등수와 내 등수 사이에는 많은 숫자가 존재했다. 그 친구에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 속으로는 부러움의 눈물이 줄줄 흘렀다.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고 믿었지만, 내 얼굴에는 속마음이 드러났을지도 모르겠다.

 

포기하기엔 일렀다. 곧 다가올 기말고사가 있었다. 나는 학원에 다니지 않았다. 교과서에 밑줄을 쳐 가며 내용을 통째로 외웠다. 덕분에 한 과목, 한 단원 공부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부 요령이 부족했다. 그렇게 기말고사를 쳤다. 반전은 없었다. 기말고사 역시 눈에 띄지 않는 성적을 받았다. 허탈감이 몰려왔다.


방학이 지나고 2학기가 되었다. 무슨 마음에선지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공부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좀 바뀐 게 있다면 전보다 암기 속도가 빨라졌고, 문제가 쓱쓱 잘 풀렸다. 느낌이 좋았다. 이제는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괜찮을 것 같았다.


성적표가 교실 앞에 붙었다. 내 이름 옆에 있는 등수를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반 석차 칸에 ‘1’이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헉. 믿기지 않아서 내 이름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손가락을 따라서 다시 한번 등수를 확인했다. 내 석차가 맞았다. 결과가 어떻든 괜찮기는 무슨. 결과가 좋으니 엄청 신이 났다. 몇 번이고 내 성적표를 들여다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그 이후로 나는 줄곧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다. 하지만 어떤 때의 시험보다도 중학교 1학년 2학기 중간고사만큼이나 짜릿한 경험은 없었던 것 같다. 성적이 잘 나왔다는 기쁨보다도, 내가 해냈다는 생각이, 나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1학년이 끝날 무렵, 담임 선생님께 편지를 받았다. 반 아이들 모두에게 편지를 써 주셨던 것 같다. 편지를 잃어버려서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게 적어주신 편지는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항상 열심히 노력하고, 성장해가는 OO이의 모습이 너무 멋있었어.’ 선생님께 가졌던 원망 어린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


이제는 오래전 이야기가 되었지만, 기억의 조각 일부는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나지막하게 묻던 선생님의 목소리, 성적을 확인하며 부들부들 떨리던 내 손가락. 그래도 이 기억들이 모여 소중한 추억으로 남게 된 것은, 이 사건을 통해 내 삶의 지표 하나를 얻었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나를 의심받는 상황이 생긴다. 하지 않은 일을 했다는 소문에 휩싸이기도 하지만,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이룬 결과도 운으로 치부될 때가 있다. 그럴 땐 생각한다. 더 열심히 하면 된다고, 다시 한번 좋은 결과를 보여주면 된다고. 그러다 보면 사람들이 서서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것이라고 믿는다. 혹여나 계속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괜찮다. 나는 이미 단단해져 있다. 그땐 누가 뭐래도 내 실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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