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가 된 것 같은…
아침에 아이를 데려다주면서 교통카드를 잃어버렸다.
도착역 개찰구를 나가려고 보니 없는 것이다.
배드민턴 라켓에 내 운동가방, 아이 체험 학습용 가방까지(모임 장소로 이동까지 등에 땀이라도 날새라..) 바리바리 짊어지고 지하철을 기다리던 찰나 오늘의 준비물을 상기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대기하고 있던 벤치 밑으로 떨어졌나 보다.
다행히 상주하고 있던 승무원이 있어 사정을 말씀드리니 출발역으로 전화를 해주셨다.
시간에 쫓겨 아이는 내 카드를 줬는데 루틴에서 벗어나니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엄마가 교통카드 꼭 찾아서 이동장소로 가져다줄게. 혹시 모르니 일단 엄마 꺼 가져가. 알았지?" 배드민턴 라켓을 보안관실에 맡기고 부랴부랴 이동한다.
다행히 아이의 교통카드를 찾을 수 있었다.
외부 활동의 날이라 모임 장소로 후다닥 이동, 잃어버린 건 엄연히 엄마인데 자신의 잘못인 양 인식되어 마음이 찌뿌둥할 아이의 심정을 생각하니 마음이 다급하다.
출발지에서 만난 아이는 교통카드를 보자 금세 표정이 환해진다.
순수하디 순한 우리 아이. '늘 좋은 것만 보여주고 늘 좋은 일만 겪게 하고 싶은데 엄마가 늘 미안해.' 마음이 울컥해진다...
그날도 그랬다.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던 우리 아이에게 못 할 짓을 하게 된 그날은...
도촬로 신고된 후 변호사를 선임하고 첫 조사를 마친 날...
"내일 같이 경찰서로 가야 해. 데리고 오래"
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
"왜? 나를 왜 데리고 오래..."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꾸한다.
"내가 이러저러하다고 우리 집 사정을 못 얘기했어. 그러니 가서 만나면 아무래도 형량에 도움이 되지"
기가 찬다.
도대체 저 뇌엔 오로지 자기밖에 없는 건가...? 남들은 평생 한 번도 안 가는 경찰서를 뭐가 좋은 곳이라고 나를 이끈단 말인가? 말문이 막힌다.
아니, 할 말은 많으나 해봤자 소용이 없기에 굳이 하지 않는다.
보통의 사람들은 이런 말을 꺼내지도 않겠지만, 꺼낸다고 해도 주저주저함이라도 있지 않나...
맡겨놓은 보따리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그럼, 준이는 어쩌고... 혼자 놔둬?"
"같이 가야지. 준이 얘기도 했는데..."
"뭐?"
정말 화가 난다.
아이의 장애를 알게 된 후, 장애 등록이며 교육이며 의논이라도 할라치면 "아, 나한테 말하지 마, 몰라"라고 회피하는 건 다반사.
그러다 막상 차를 바꾸면서는 등록증엔 아이와 같이 올리고 빠짐없이 통행료 혜택은 받고...
동병상련의 엄마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나의 경험담을 전하기 위해 EBS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남편은 장애를 광고하면서 자랑질하지 말라고 특히 친정 식구들한테 방송 출연한 거 자랑하지 말라고.
시어머니 장례식장에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친구들 앞에서 노출된 아이가, 3일 동안 장례식장에서 갇혀 지내던 아이가, 꾹꾹 참다 납골당에서 떼 좀 부렸다고 사람들 앞에서 악다구니를 쓰면서 손을 든 사람이...
본인 빼고 애를 키워 본 부모라면 인사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아이의 장애를 꼭꼭 숨긴다고 눈 가리고 야옹한다고 세상에 비밀이 어딨어...
장례식장 내내 아이는 거들떠도 안 본 사람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시시덕덕 거림에 몰두했던 사람이.
장애부모로서 혼자 고결한 척하던 사람이 결국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를, 아이를 도구로 쓰려고 한다.
파렴치한이라고 말하기에도 모자란다.
마음은, 속은 용광로처럼 들끓으나 표현하지 않는다.
안 살 거면 모르지만 아우성친다고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자신이 세운 계획에 흠결이라도 나면 미치고 마는 저 성질을 어차피 무마할 수 없는데 뭣하러 생채기를 내면서 내 마음만 다친단 말인가...
그런데, '나는 의식이 없어지는 걸까? 생각이라는 걸 못하게 된 걸까?'
어느새 짙은 한숨이 라마즈 호흡법처럼 천천히 느리게 뱉어진다.
몇 차례 반복하니 한결 낫다.
'뭐, 어때? 인생은 연극이라는데 오늘은 삶에 찌든 아낙네의 역할인가 보다 하지 뭐.'
저녁 경찰서로 가는 길에 빈 손으로 갈 수 없다며 음료수라도 사자고 한다.
그러든가 말든가...
마트 앞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뭐? 이것도 달랑 100만 원 주는 생활비에서 계산하라고? 말도 안 되지.'
나도 버틴다.
마지못해 차 문을 열고 나간다.
'아, 이럴 땐 이렇게 버텨도 되는구나. 지금의 상황에서 본인은 얼마나 마음이 다급하고 가슴 졸일까 하는 감정이입 따위는 필요가 없는 거구나...'
하나하나 세상살이를 배워가는 기분이다.
'좋은 게 좋은 건 아니야. 그런 건 없어.'
다만, 모질어지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머리를 굴리게 되는 나의 변화가 안쓰럽다.
인상이 강한 나의 첫 이미지를 보면 어느 누구나 선입견을 갖는다.
그러다, 한 번 두 번 접하다 보면 의외로 순하고 선한 심성에 모두가 놀랜다.
나를 대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보기보다 너무 착한 거 같아요.'라고 한다.
그토록 약게 살라고 가르치던 엄마의 가르침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 것이다.
그나마 늘 잔머리를 굴리는 남편을 만나 위와 같은 버티기 전략을 습득한 나로서는 아직도 혼란스럽긴 하다.
'누가 뭐라고 한들, 어떤들 나는 나야. 모멸 차게 대했다 밤바다 후회하느니 그냥 순수한 교제로 마음을 좀 다치더라고 그게 더 편해.
가해자의 악함보다는 피해자의 선함이 나를 덜 힘들게 하잖아.'
그런데, 그런데...
남편의 이기심 앞에서는 상처가 누적 댄다.
차곡차곡 적립된 그 상처가 곪고 터지고 다시 곪고 이제 제법 익숙해 질만도 한데 밤이면 쓰린 가슴을 부여잡고 흐느끼는 나의 정서는 아직도 멀었나 보다.
그래도 오늘은 한 건 해냈다.
'잘 버텼어.
경찰서까지 동행하면서 음료수까지 사 안기는 것은 선함이 아니라 어리석음이야. 착하게 살자고 했지, 바보 천치가 되자고 한 것은 아니잖아. 제발 사리분별을 제대로 해. 뭉퉁거리면서 퉁 치지 말고...'
경찰서를 들어서는데 마음이 어질 하다.
과거, 남편의 폭행으로 몇 차례 들린 이곳을 다른 이유로 또 온 것이다.
'내 인생의 꼬임은 이 인간으로부터 초래되었다.'라고 하기엔 나의 우둔함이 큰 몫을 차지했다.
후회, 원망은 미래를 좀먹는다.
도리질하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른다.
주차를 하면서 올라가자고 한다.
아이까지 데리고...
따라는 왔으나 아이까지 데리고 경찰관을 만나려니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나는 그렇다 쳐도 아이는 왜? 이 아이를 아무도 모르겠지만 굳이 이런 일에 얼굴까지 팔려야 하는가? 아, 생각 안 하려고 하는데 자꾸 치밀어 오르는 화는 나를 몹시도 힘들게 한다.'
"와놓고 왜 안 올라가? 빨리 가자고. 너는 걱정도 안 되냐?"
헐~~~
"내가 걱정해야 하는 거지? 그럼 준이는 차에 두고 우리끼리 가자. 애까지 얼굴 팔려야 하는 건 아니잖아."
"아씨, 좀... 애도 데려가야지. 직접 봐야 경찰관이 선처해 줄 거 아니야"
답답....
후우~~~
욕이라도 뱉고 싶은데 마땅히 떠오르는 단어가 없다.
'이런 C~~ 무지하다, 무지해...
욕도 제대로 못하는 거니?'
잠깐의 이 망설임 찰나 누군가 내려온다.
급하게 뛰어나가는 남편.
그분인가 보다.
조서를 맡은 그 수사관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