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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종 Apr 29. 2024

억지 긍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잘해줘도 당신 곁에 남지 않는다>를 읽고

전미경 정신과의사가 쓴 <아무리 잘해줘도 당신 곁에 남지 않는다>와 < 당신은 생각보다 강하다>라는 책을 읽고 많은 걸 배웠다.


“본래 긍정적인 감정은 즉각적인 반응이다. 자동으로 튀어나와야 하는 긍정적인 감정을 억지로 만들어내려니 마음이 편할 리 없다.”라는 문장이 특히 나에게 와닿았다. 아기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요즘처럼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자연을 대할 때 억지로 즐거움과 행복감을 만들어낼 필요는 없다. 그 순간의 아름다움으로 마음이 가득 채워지는 긍정적 감정에는 치유의 능력까지 있는 듯하다.


반면 억지로 긍정적 감정을 끌어내려 노력할 때 힘들었다. "그 마음을 수정하는데 실패했다면 그다음은 대게 생각을 수정한다. 비호감인 A를 두고 ‘이 정도면 괜찮은 동료’라고 억지로 생각을 바꾼다.”


“우리가 생각을 고쳐보는 것은 인지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외는 주문이다. 이렇게 생각을 수정하는 방법에는 큰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타인이나 상황이 아닌 나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타인이나 상황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A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은 A가 증명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자신이 못나서 이런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쉽고 간단하다. 자기 비하는 당장의 마음의 갑갑함을 해결해 주지만 계속되면 마음속을 갉아먹는다.”


내가 많은 시간 고민해 온 문제였다. ‘타인의 좋은 면을 찾아라, 긍정적으로 생각해라. 타인을 바꿀 수 없으니 내 생각을 바꾸라’고 주장하는 책들도 많았다. 그 말대로 마음이 편안해지기 위해 상대방의 좋은 점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고 내가 그들을 변명해주고 있었다. '내가 이사할 때 비싼 선물도 사줬잖아. 그래도 나에게 친절할 때가 더 많았어. 얼마나 힘들면 그러겠어. 사랑받지 못해서 그 결핍감 때문에 저러겠지 ‘등등 그들의 변명을 내가 만들어내며 이해해 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늘 신경 쓰이는 사람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해되지 않기에 이해하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했다. 급기야 내가 그 정도도 이해 못 하는 나쁜 사람인가, 정말 내가 못 말리게 예민하고 쓸데없는데 신경 쓰는 쫌생이 인가라는 자기 비하로 이어진다.


타인에게 너그럽지 못한 소심하고 작은 그릇의 사람이라는 자아상이 만들어졌다. 나의 고통의 과정이 그거였다. 이 책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이해하기 힘든 자의 변명까지 해줄 필요는 없다는 거다.


같은 작가의 최신 책인 <아무리 잘해줘도 당신 곁에 남지 않는다>에서도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타인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면 그다음 수순은 그 사람과의 거리 조절입니다. 거리를 두면 내가 그 사람의 영향권에 들어갈 경우에 받게 될 영향을 미리 체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타인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못 하면 인생을 낭비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관계를 좋게 잘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행동은 이제 그만합시다. “라고 가르쳐준다.


“온전한 감정의 사람과 만나면 그 만남이 즐겁고 만남의 찌꺼기가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양가감정이 있는 관계는 얼른 양자택일의 결론을 내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지만 머릿속이 단순해지고 안정될 수 있습니다.” 너무도 공감 가는 말이다. 온전한 감정을 주고받는 관계는 만나고 오면 좋은 기분만이 은은히 남아 바로 일상생활을 이어나갈 힘을 주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나고 오면 알 수 없는 찜찜함에 그의 말을 곱씹게 되고 마음속에서 그 말들에 대한 자신의 변명과 그를 위한 변명으로 속이 시끄러워진다.


싫은 사람이 나의 머릿속을 점령하고 늘 그와 같이 있는 듯 한 지옥에 살게 된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심리도 파헤쳐보고 그의 부모님과의 관계, 현재 가족관계까지 생각해 보면서 어떻게든 이해되지 않는 그를 이해하려 노력해 왔다.


그런 노력에 대해 작가는 이야기한다. “왜 그런 인간이 되었는지 그 서사를 들여다볼 필요는 없습니다. 왜 저렇게 자격지심이 있고 허세 부리는 인간이 되었는지 알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관계에서는 현재 여기서 너와 나 사이에 일어나는 결과에만 입각해서 상대방을 평가하고 판단하면 됩니다. 상대방의 과거 트라우마나 결핍, 열등감, 내면의 갈등 등을 굳이 알고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에게 직접 해주는 이야기 같았다. 내가 늘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과도한 노력으로 지쳐가고 힘들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누구나와 다 잘 지내야 한다는 강박이 심했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고 힘이 없어지다 보니 그게 너무 힘들었다.


나를 직접 공격하고 충고를 가장한 비난을 일삼는 사람들에게 20년간 들인 그런 노력들이 아까워지는 순간이다. 그들을 용기 있게 끊어냈지만 지금도 여전히 변명해 줘야 하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는 내가 너그럽지 못한 건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다.


이 책들에서 해답을 찾아 조금씩 적용해보려고 한다. 그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거리 조절을 하는 것이다. 거리를 두고 내 감정소모의 양을 서서히 줄여나가려고 한다. 인간관계의 갈등이나 껄끄러움을 이제 더 이상 두려워하고 피하지만은 않겠다. 더 이상은 내가 해결해 줄 수 없다는 말도 해보려고 한다.


“부정적인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흩뿌리는 사람들은 타인에게 감정노동을 시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흩뿌리는 사람 옆에 있는 사람들은 사적인 영역에서 감정노동을 강요당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감정노동을 시켜서도 안 되며, 감정노동을 당해서도 안 됩니다. 감정노동은 가짜관계의 시작입니다. 나의 과거와 이로 인한 나의 부적절한 부정적 감정을 나 혼자 감당해야 합니다. 나 또한 상대방의 과거의 부정적 감정을 감당한 필요가 없습니다.”


명쾌한 말들이다. 나의 고민을 직접 상담해 준다 해도 이렇게 속 시원하게 해결해 줄 수 없을 만큼 명쾌하다.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 감정까지 늘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알 수 없는 부채감을 갖고 살아왔다. 그걸 깨달은 지도 얼마 되지 않는다. 늘 엄마의 감정쓰레기통으로 살아와서 인지 남편이나 아이들의 부정적 감정들을 두고 보기 어려웠다.


어떻게 해서든지 해결해 줘야 할 책임이 나에게 있는 거 같아 전전긍긍이었다. 아이가 어릴 때 혼낸 것 때문에 지금 저렇게 술을 많이 마시나, 내가 뭘 강요했나? 늘 나 자신을 점검하고 또 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혔다. 그냥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고민이나 힘듦을 다 내 탓을 하며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이제는 그런 감정에서 벗어나보려고 한다. 유아기 때 부모의 양육태도와 상호작용 방식이 아이의 평생에 드리운다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너무 맹신했나 보다. 이 책에서도 이야기하듯이 프로이트가 살던 갇힌 시대에는 효과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좀 더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에는 발전적으로 적용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그저 과거의 상처에 휘둘리기만 할 만큼 인간이 나약하지 않다는 생각도 해 볼 수 있다. 상처를 치료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만큼 스스로를 단련할 수도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거의 다 치유되었고 잘 살아나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늘 새롭게 나를 깨우쳐주는 일들이 생겨난다. ‘이런 걸 배우려고 사는 거겠지?’라고 생각하면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게도 조금은 너그러워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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