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수종 May 07. 2024

일상의 작은 성취

- 옷 정리와 냉파

며칠 전부터 딸의 옷을 정리하고 있다. 27살이나 됐으니 정리를 해주지 않으려고 단히 참아왔다. 집에서 가장  옷장을 갖고 있고 다른 계절 옷상자들이 베란다와 거실을 점령하고 있어도 스스로 할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게 2년이 넘어가지만 한 번도 스스로 정리하지 않았다.


베란다에 빨래를 널거나 물건을 꺼내러 나갈 때마다 옷들이 토해져 나오고 있는 봉다리들과 상자들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어느 날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서 큰 봉지를 들고 딸 방에 들어갔다. 다짜고짜 옷장을 열고 입을 건지 버릴 건지 결정하라고 했다. 아이는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그동안 옷 정리하라는 말을 수 없이 들었던 터라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순순히 참여했다.


그렇게 버릴 옷들을 정리하자 옷장은 훨씬 가뿐해졌고 입을만한 옷들로만 채워진 모습에 기분까지 상쾌해졌다. 베란다도 홀가분하게 왔다 갔다 하기 편해졌다.


옷 정리를 하느라 힘은 들었지만 아이방과 베란다에 들어갈 때마다 기분이 정말 좋았다. 성취감을 느낄 일이 별로 없는 일상에 아주 확실하고 강력한 성취감을 선사해 다.


이 일을 계기로 다시 정리에 대한 열망이 솟아올랐다. 당장 이불장에서 안 쓰는 이불과 베개 등을 꺼내 쓰레기 봉지에 넣었다. 사실은 유기견 센터에 보내야지 하면서 이불 정리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유기견 센터를 찾아보고 이불을 담을 만한 큰 상자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느라 지금까지 미룬 거였다. 그런데 그날은 당장 버리고 그 일을 해결해버리고 싶었다. 또 미루고 기다릴 수 없는 심정이었다.


이불들이 가득 차서 늘 위태롭게 쌓여있던 옷장에도 여유가 생겼다. 이제 남은 일은 군대에 가있는 아들방의 베란다 정리다. 거기엔 요양원에 가신 엄마 옷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잡동사니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제는 입을 수 없는 엄마 옷을 추려내서 과감히 버리려고 한다.


집 정리와 함께 성취감을 느끼고 게임처럼 즐기는 재밌는 일이 냉장고 파먹기라고 하는 냉파다. 2년 전 이사로 냉장고를 비워야 하는 강제적 상황에서 해봤는데 성취감이 대단했다. 어쩔 수 없이 하기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내가 이토록 창의적인 사람이었나? 와 나 꽤 잘하는 걸’ 하면서 뿌듯하고 재밌었다.


먹을만한 거 하나 없어 보이던 냉동고에서 꺼낸 재료들로 양장피, 감자탕, 비빔만두, 칠리새우, 수육 등등 화려한 요리들을 차려냈다. 오래 묵혀두었던 감자로 감자전과 감자샐러드를 만들고 실온의 국수나 스파게티 면과 통조림들로도 얼마든지 맛있고 멋진 음식들을 만들어 냈던 기억이 기분 좋게 남아있다.


이사라는 압박감이 느껴지는 상황이어서 머리가 휙휙 돌아가고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나서 그렇게 했었지 사실 평범한 일상에서는 재료가 부족하면 바로 쿠팡이나 마켓컬리에서 주문하는 게 더 편리하다.


결심이 쉽지 않던 차에 최근 큰돈 쓸 일이 생겼다. 그 돈을 메꾸려면 몇 달간 긴축재정을 해야 한다. 이 기회에 다시 한번 옷 정리를 철저히 해서 남들처럼 '100일간 옷 사지 않기' 같은 챌린지도 해보고 냉파도 다시 한번 해볼까 한다.


나는 옷을 좋아한다. 아이들 옷이 많다고 뭐라 할 일은 아니다. 자주 보는 인터넷 쇼핑몰이나 홈쇼핑에서 비싸지 않은 괜찮은 옷들을 소소하게 사고 가끔 아웃렛이나 제일평화시장 같은 곳에서 옷을 사는 일이 나의 큰 기쁨 하나다. 계절마다 새 옷 몇 벌 정도는 사서 기분 좋게 입는 게 뭐 그렇게 낭비인가라는 생각이었다. 싸지만 자주 사는 게 문제였다. 버리기도 잘 버리지만 사기도 잘 산다.


옷들도 자주 사다 보니 합쳐서 나온 카드 값이 꽤 크다. 지금부터 100일간 옷 안 사기를 해볼까 한다. 이렇게 공표해야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글로 남긴다.


냉장, 냉동실과 실온에 보관 중인 식재료를 소진할 때까지 되도록 장을 보지 않겠다. 우유와 간장, 고추장 같은 기본 재료 정도만 살까 한다. 이런 일들이 돈을 아껴주기도 하지만 작은 성취감을 느끼게 해 준다. 


어떤 목표를 정하고 성취하는 경험이 최근에 전무했다. 브런치에 글 쓰는 일이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일이었다. 살림은 일상이 돌아가는 정도로 최소한만 했다. 살림에 싫증이 많이 나 있었다. 밖으로만 나돌아 다니고 싶었다. 그게 길어지니 어느 순간 공허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밖으로만 향하는 시선을 이제는 또다시 자신과 주변 환경을 정리하는데 돌릴 때가 왔다.


사람들을 만나고 온 뒤에 느끼는 행복감도 분명히 크지만 또 그만큼 헛헛함과 이해하고 이해받지 못한 괴로움의 순간도 많았다. 매일매일 바쁘게 사람들을 만나 놀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 집은 엉망이 되고 순간순간 스치는 감정들을 제 때 돌보지 못했을 때 문제가 생긴다.


한 번씩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을 정비해야 한다. 그럴 때 집 정리, 냉장고 정리가 도움이 다. 주변을 정리하면서 쓸데없는 물건들을 처분하고 버리고 난 뒤 필요한 것과 좋아하는 것들만 남은 집을 돌아볼 때의 기분이 인간관계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거 같다. 한 때 정말 좋아하고 친하게 지냈지만 그 인연이 다 하면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도 있다.


그걸 받아들이고 억지로 끌어당길 필요가 없다는 걸 배운다. 자꾸 성가시게 생각하게 되고 곱씹게 되는 관계는 자연스럽게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집 정리를 하면서 배운다. 많은 추억과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여전히 예쁜 물건들을 보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억지로 쓰임을 생각해야 하고 쓰지 못하는 게 괴로워 자꾸 생각해야 하는 물건은 과감히 처분해야 한다.


많은 미니멀라이프 책에서 이야기하듯 정리해야 좋은 새 물건이 들어올 자리가 생기고 인연이 다 된 관계도 정리해야 새로운 인연을 만날 수 있다. 마음을 닦고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하는 고독한 시간이 필요한 때가 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