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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종 Sep 23. 2024

오래된 집과 식물들

저번에 깁스를 하게 돼 집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 피아노도 치고 그림도 많이 그리게 됐다는 글을 썼다. 글을 쓰고 나서 그림을 더 많이 그렸다. 그리고 싶은 장면을 찾기 위해 혼자서 돌아다녔던 곳의 사진과 친구들과 여행 가서 찍은 사진들을 찾아봤다.


친구들과의 여행은 정말 즐거웠고 경치도 좋았지만 내가 그리고 싶은 장면은 이상하게 혼자 가서 찍은 사진들 속에 더 많았다. 혼자 갔기에 경치와 사물들을 좀 더 오래 쳐다보고 그때 생겨나는 감정을 느낄 여유가 있어서 그런 거 같다.


그리고 그 사진들의 공통점을 찾아냈다. 지난 1~2년간 찍은 사진 중 골라낸 사진들은 한결 같이 아주 오래되어서 낡은 느낌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집들과 그 주변을 풍족하게 에워싸고 있는 식물들이었다.


집은 비록 낡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지만 그 주인이 가꾸었음에 틀림없을 화분들이나 나무들은 그 계절에 맞게 새로 살고 있었다. 그 생생함과 오래된 집의 조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만들어내고 그게 너무나도 좋았다.


성수동의 힙한 상점과 즐비한 식당들과 세련된 건물들 틈에서 내가 발견한 집은 오래된 저층 아파트였다. 허리가 구부러진 곱게 늙은 할머니 같은 느낌의 아파트였다. 그런데 그 앞의 작은 정원은 할머니를 사랑하는 손녀가 가꾼듯한 생동감을 주어서 한참을 쳐다보다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던 곳이다. 화분들에게 줄 비료포대를 사놓고 어수선하게 늘어져 있는 모습마져 친근하게 느껴졌다.


요즘 유명하다는 서순라길도 혼자 다녀왔는데 파리의 노천카페 같은 식당에서 젊은이들이 와인과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에 조금 주눅이 들었다. 50대 아줌마가 혼밥 할 만한 식당도 마땅치 않아 그냥 구경하다 우연히 발견한 마음 편안해지는 장면을 찍었는데 그 사진도 오래된 기와집과 그 앞을 풍성하게 장식하고 있는 꽃화분들이었다.


이런 일들을 통해 내가 뭐를 좋아하는지, 어떤 취향을 가졌는지가 서서히 드러나는 거 같다. 반복해서 하는 생각들, 내가 찾는 장소들, 내가 찍은 비슷비슷한 사진들에서 나라는 사람이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다.


요즘 레트로가 유행이라 그런지 오래된 주택을 리모델링해서 신구가 어우러지게 꾸며 놓은 곳이 많다. 그런 곳들도 찾아다녀봤지만 한 번 와본 걸로 족했다. 만들어 놓은 가짜 세월의 흔적에는 크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찍은 사진들을 보니 오랜 세월 살면서 주인과 함께 나이 들어갔음이 고스란히 드러난 집들과 주변에서 오랜 세월 매년 매 계절마다 새로 태어나는 식물들의 정겨운 어울림은 마음속에 잔잔한 일렁임을 선물한다.


글을 쓸 때도 그렇고 그림을 그릴 때도 ‘왜 나는 늘 비슷한 글만 쓰고 비슷한 그림만 그리고 있나’라고 생각하고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좀 변화를 줘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는데 잘못된 생각이었다.


반복해서 쓰고 반복해서 그리는 것에 나의 정체성이 들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거장 이야기를 꺼내는 게 좀 그렇지만 쿠사마 야요이는 호박의 색과 크기만 달리 한 땡땡이 무늬 작품을 계속 만들고 있지만 아무도 '왜 똑같은 것만 만드느냐'고 하지 않는다.

나오시마섬 쿠사마 야요이 작품



땡땡이 무늬가 그녀의 정체성이 되고 하나의 브랜드처럼 인식되고 있다. 4월에 간 나오시마 섬 여행에서 그녀의 호박 작품 두 개를 보고 동네를 돌아다니는 땡땡이 무늬 자동차도 봤다. 쿠사마 야요이를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그녀의 아우라가 마을 전체를 감싸고 있는 듯했다. 그 작가가 사로잡혀 있는 것, 그것이 그의 정체성이고 그걸 부정할 수 없다.


꼭 성공한 유명작가들만 그럴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일반인들도 그래도 된다. 아니 그래야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색을 찾고 나라는 사람을 알아나갈 수 있다.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서 좋을 만큼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을 만큼 표현할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아직 부족하고 초보자이기에 보이는 실수들에 대해서도 ‘이게 난데 어쩌라고’의 정신이 우리에게는 많이 필요하다. 그런 뻔뻔함을 조금은 장착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고 나를 찾아나가는데 도움이 된다는 걸 배우고 있다.


‘조금씩 늘겠지’라고 생각하며 자주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그 순간을 즐기는 가벼운 마음이 되자 더 자주 하게 되고 행복해졌다. 쓰고 싶은 것이 떠오르면 그냥 막 쓴다. 그리고 싶은 것을 찾으면 그냥 막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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