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수종 Oct 08. 2024

그림 그리며 알게 된 나의 변화

요즘 그림을 자주 그리다 보니 예쁜 장면을 보면 그림으로 변환되면서 저 부분을 어떻게 그리면 더 예쁠까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눈을 감으면 그림들이 둥둥 떠다닌다. 그리고 싶은 어떤 장면이 떠오를 때도 있다. 방금도 어릴 때 살던 집 작은 마당에서 참새 두 마리가 종종거리며 뛰어다니던 장면이 떠올랐다. 나뭇잎이 가득 달린 나뭇가지가 늘어져 있는 곳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경계하면서도 뭔가를 부지런히 쪼아 먹는 것을 나무 뒤에서 숨 죽이며 지켜보는 다섯 살의 내 모습과 함께.


아직은 대상을 직접 보고 그릴 수만 있지 상상한 것을 그릴 능력은 없지만 그런 이미지들을 꾸준히 모으다 보면 언제가 실력이 나아지면서 그릴 수 있는 날이 올 거라는 기대를 해본다.


그림을 그릴 때 그 장면에 포인트가 될 만한 것을 나름대로 강조해서 그린다. 실제보다 조금 더 크게 조금 더 진하게 색칠하기도 하고 그저 그 모습을 혼자만 흐뭇하게 생각하며 그리곤 한다. 그러다 보니 사진과 비슷하면서도 그림만의 또 다른 분위기가 생기는 거 같고 서툰 내 그림이 나에게는 무척 재밌다. 물론 나만 아는 포인트지만 그림 한 장을 완성할 때마다 느끼는 충족감이 생각보다 크고 즐거워서 놀라고 있는 중이다.


다리를 다치며 강제 감금생활을 하다 보니 통으로 시간이 주어진 것이 그림에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좀 복잡해 보이는 그림에도 도전해 보았더니 만족감이 컸다.


예전엔 단번에 금방 그릴 수 있는 쉬운 장면만 그리곤 했다. 좀 복잡해 보이고 사물이 많은 것은 아예 시도할 생각도 못했는데 이번에 그 시도를 했고 여러 번 성공하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전에는 시도할 용기조차 없었다. 맞다. 그것도 용기였다. 그만큼의 용기도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그리다 힘들면 그냥 말아도 괜찮아, 누가 뭐래’ 이런 생각으로 수많은 나뭇잎을 반복해서 그리고 팔각형의 방범창의 무늬를 수없이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와 그림 그리는 방식이 많이 닮아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전에는 단번에 쉽게 그릴 수 있는 것 위주로 그렸고 조금만 어려우면 ‘그래, 내가 이렇게 어려운 걸 어떻게 해’ 하고 쉽게 포기했다. 그리고 ‘역시 난 재능이 없구나’ 하며 의기 소침해지곤 했다.


지금은 아무 생각 말고 이 벽돌 하나, 나뭇잎 하나하나 성의 있게 그리는데 집중해 보자라는 마음이 되었다. 대충 뭉뚱그려 그려도 그럴듯하게 그릴 능력이 없으니 그저 보이는 대로 자세히 바라보고 그 모습과 같은 선과 곡선을 찾아내서 비슷하게 그려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하다 보면 어느새 완성 돼 가는 그림을 마주하게 된다.


가장 비슷한 색을 찾고 덧칠하면서 점점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볼 때 기분이 정말 좋다. 신기하고 경이롭다.


복잡해 보이고 뭔가 사물이 너무 많아 못 그릴 것 같다고 포기한 사진들을 이제 하나씩 완성해가고 있다. 늘 하고 싶었지만 자꾸 미루게 되던 ‘하루에 그림 한 장’을 실천하고 있다. 한 장이 아니라 간단한 그림은 몇 장씩 그리기도 한다. 며칠 걸리는 좀 복잡한 그림과 병행해서 기분 전환용으로 음식이나 간단한 사물 그림을 몇 장씩 그리고 있다.


내가 삶을 대하는 자세가 변하자 그림 그리는 자세, 피아노를 대하는 자세까지 달라졌다. 이제 걸음마를 떼면서 내 눈은 늘 100m를 10초대에 주파하는 스타 육상선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몇 걸음 떼다 넘어지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가는 걸 쉽게 포기해버리곤 했다. 자꾸 넘어지는 게 창피해서 원래 안 가기로 했던 거처럼 주저앉아 몇십 년을 그러고 있었다.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넘어져도 창피하지 않다. 내가 걸을 수 있는 만큼 매일 조금씩 걷는다. 그렇게 조금씩 걷다 보니 어느새 출발선에서 이만큼 왔다는 기쁨을 느낄 기회도 주어졌다. 아직도 출발선에서 나를 비웃으며 뭐 하러 저러고 우스운 꼴로 걷느냐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난 그냥 내 앞만 보고 내가 걸을 수 있는 만큼만 걷기로 했다. 달라진 풍경을 감상하며 단단해진 내 다리에 감사하며 그렇게 걷기로 했다.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단 번에 그릴 수 있는 그림만 그릴 때는 실력이 조금도 늘지 않고 성취감도 크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오늘 그릴 대상에만 집중하고 해낼 수 있는 만큼 인내심을 갖고 하나씩 차분히 그려나가다 보니 처음에 엉망으로 보이던 그림이 완성되어 있었다.


내가 태도를 바꾸자 모든 것이 그렇게 차분히 나에게 내려앉는 기분이 든다. 그냥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몰입하면서 생각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해 나가는 기분이 정말 좋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