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거실 테이블을 보니 내 미술용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내 책상이 따로 없다 보니 넓은 거실 테이블을 내 책상 겸 그림 작업대로 쓰고 있다. 어느새 미술 용품들이 한가득이다. 더 잘 그리고 싶어 도구들을 하나씩 늘려가다 보니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엄청 많아졌다.
그 많은 미술용품을 보니 내가 그리는 방식을 한번 글로 써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도 뭐로 그렸는지 어떻게 그리는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전에도 작은 수첩에 끄적거리는 걸 좋아해서 색연필은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쓰던 보통 색연필로 그렸을 때는 색이 그다지 예쁘지 않아 색칠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프리즈마색연필이 발색이 좋고 색이 잘 섞인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그래서 42색을 샀다.
색칠을 하다 보니 42색인데도 원하는 대로 표현이 되지 않고 부족함이 느껴져 다시 72색을 샀다. 그게 한 4~5년 전이다. 그림을 자주 그리지도 않으면서 무슨 생각인지 그렇게 미술도구들을 사들였다. 또 그때쯤 오일 파스텔 그림이 한창 유행하자 이번에는 처음부터 다양한 색이 있는 걸 사자는 마음으로 문교 오일파스텔 120색 우드케이스를 샀다.
그뿐 아니라 12색 컬러 브러시 펜도 사고 펜화를 그릴 수 있는 로트링 그래픽 펜도 두께별로 사들이고 있었다. 정작 그 도구들을 샀을 때 한두 번 그린 후 원하는 대로 그려지지 않자 어딘가 처박아 두곤 했는데 그런 펜과 스케치북만 있으면 멋지게 그리는 사람들처럼 할 수 있을 거 같아 사들이기만 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렇게 준비는 되었지만 어쩌다 한 번 그려보는 정도지 제대로 시작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지난 9월에 무릎뼈가 부러지고 거의 6주간 외부와 차단돼 지낼 때 드라마도 보다 보다 더 이상 볼게 없어지고 책만 읽기도 지겨워질 무렵 드디어 그림을 제대로 그려보자는 마음이 솟아났다.
그렇게 처음 그린 그림이 서순라길 풍경과 성수동 저층 아파트 앞 화단그림이었다. 지금 보면 많이 서툴고 부족하지만 그때 그림을 완성한 뒤 느낀 성취감은 엄청났다. 그냥 컵이나 화분, 꽃 한 송이 정도만 그리다 내가 좋아하는 장면의 그림을 A4크기 가득 채워 완성시켰을 때의 희열은 생각보다 컸다.
무릎뼈가 부러진 일은 누군가가 “어서 네가 하고 싶던 일을 해. 억지로라도 가둬놔야 하겠니?”라며 일부러 만들어준 사건 같다. 무릎뼈가 부러지기 한 달 전쯤에도 엄지발가락에 금이 가기도 했었지만 그 정도로 나를 가둘 수는 없었다. 반 깁스를 하고도 웬만한 곳은 다 다닐 수 있었고 2주 만에 회복되었다.
친구들은 내가 삼재라서 그렇다고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누군가가 나의 오래된 꿈을 시작해 보라고 외부와 차단시킨 채 몰입할 시간을 준 거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아직도 그림에 대한 선망만을 품은 채 미술 도구를 사는 일로만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을지 모른다.
이제는 그 많은 미술도구들을 사용해 매일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 과정을 한 번 정리해 보겠다.
제일 처음에는 아이디어를 찾는다. 주변을 관찰자의 눈으로 본다. 그 눈으로 보면 늘 다니던 길에서도 그릴 것들을 찾고 어디든 예쁜 것들이 가득 차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렇게 사진을 찍거나 인터넷에서 예쁜 사진들을 캡처한다. 과거 추억을 떠올리며 사진첩을 뒤져 키우던 강아지나 옛날 우리 집과 집 안의 물건들을 새로운 눈으로 보기도 한다. 아이들 어릴 때 모습을 그리기 위해 사람 그리는 연습을 하고 있다.
어제는 오래된 잡지책을 보다 예쁜 머그컵을 발견해서 그리기도 했다.
그다음엔 그리기로 마음먹은 사진을 몰스킨 아트 A4크기 스케치북에 4B연필로 스케치한다. 색연필 살 때 사은품으로 받은 프리즈마 4B나 2B연필로 그린다.
다 그리고 난 후 사진을 찍어 비율이나 뭔가 어색한 부분을 고친다. 아직은 지우개로 지울 수 있는 단계이기에 여러 번 사진을 찍어 좀 멀리 떨어져 본 후 고치는 작업을 한다. 실력이 나아질수록 고치는 횟수가 줄어든다.
그렇게 어느 정도 완성이 되면 사쿠라 피그마 마이크로 0.5mm 펜으로 선을 그리고 지우개로 지운다. 여러 지우개를 사용해 보니 아인지우개가 제일 깨끗하게 지워졌다. 그런데 지우개밥이 엄청나게 나오고 치우기 힘들었다. 그림재료 파는 앱에 들어가 보니 지우개밥 빗자루가 있다는 걸 알고 2천 원에 사서 아주 잘 쓰고 있다.
꽃처럼 검은색 선이 남는 게 예쁘지 않은 그림은 파버 카스텔 떡지우개라는 점토 같은 지우개를 굴려가며 살살 지우면 연필선이 아주 약하게 남는다. 그 위에 꽃 색에 맞는 색연필로 그리면 꽃의 여린 느낌을 살리며 그릴 수 있다.
이 작업이 끝나면 드디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칠하는 순서다. 그림의 포인트가 되는 색이 예쁜 부분을 제일 먼저 칠한다. 그 뒤에 여러 색이 섞이는 바위나 옛날 집의 세월에 바래 여러 색이 섞이는 부분을 칠한다. 이런 곳에는 제일 밝은 색으로 전체적으로 칠한 후 점점 진한 색들을 올린다.
색들이 오묘하게 섞이면서 사진 속처럼 표현될 때가 재밌다. 프리즈마 색연필은 이런 색 섞임이 아주 잘 된다. 부드럽고 진하게 표현되어 색칠하는 재미가 배가 된다. 무르기 때문에 얇게 표현해야 할 부분을 가늘게 깎아 그리다 보면 자주 부러지는 단점은 있다.
세밀하게 그려야 할 때 날카롭게 잘 깎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색연필 그림에는 연필깎이도 필수다. 처음에는 색연필 살 때 사은품으로 받은 미니 연필깎이를 썼는데 자주 그리다 보니 작은 걸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 파버카스텔 연필깎이를 6천 원 대에 구입해 잘 쓰고 있다.
마지막으로 색칠 한 곳 중 강조하고 싶은 부분에 검은색으로 테두리를 한 번 더 그려주거나 진하게 색칠해진 곳의 낙엽이나 작은 것들을 마커를 사용해 표현한다. 처음에 그런 작은 것들도 색연필로 색칠하다 보니 진한 색들에 묻혀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다. 그래서 찾아보니 마커를 쓰면 된다는 걸 알게 됐다.
유니 포스카 마커 8색과 모로토우 아크릴 마커를 사용한다.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 창틀 위에 겹쳐지는 방범창을 표현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색연필로는 진한 색 위에 옅은 색은 겹쳐 그릴 수 없어서 그 느낌을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물감도 사용해 봤는데 수채 물감으로는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고심하다 찾은 방법이 마커로 그리는 거였다. 마커의 색이 한정적이라 딱 맞는 색을 찾기는 힘들지만 비슷한 색을 찾아 다 그려진 창문 위로 방범창이나 가는 선 같은 부분을 올려 그리니 그런대로 예쁘게 표현됐다.
사실 이 부분이 완벽히 마음에 들지는 않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 중이다. 아크릴 물감을 사서 시도해 볼 생각도 하고 있다. 좀 더 세심하게 맞는 색을 쓰기 위해선 그 방법이 좋을 것 같은데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본 적이 없어서 좀 더 찾아보고 공부해 보려고 한다.
이런 고충을 이야기하면 주변에선 학원에 가서 배우라고 한다. 근데 이상하게 그러고 싶지가 않다. 그냥 문제가 생기면 천천히 여러 방법을 시도해 보며 제일 좋은 방법을 찾아내는 게 더 좋다. 결과물이 좋아지는 속도도 느리고 이상할 수도 있지만 내 그림만의 느낌을 찾는 데에는 이 방법이 제일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누군가 학원에서 배운 더 멋진 그림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난 그 그림들에 정이 가지 않았다. 선생님이 조금씩 손을 대기도 하는 그런 그림은 내 취향이 아니다. 난 서툴고 투박해도 내가 좋아하는 화가들의 풍과 나만의 느낌을 살린 못 그린 내 그림이 더 좋다. 학원에 가면 그걸 잃게 될까 두렵다.
내가 그림으로 대학입시를 할 것도 아니고 대회에 나갈 것도 아니기에, 그냥 이런 식으로 원하는 대로 필요할 때 그때그때 찾아보고 연구하며 방법을 찾아가는 일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잘못 산 펜이며 마커, 스케치북도 만만치 않게 많지만 학원비보다는 싸다고 합리화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