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초에 경주 여행을 다녀왔다. 벚꽃이 한창인 시기에 딱 맞춰 가서 황홀한 벚꽃구경을 원 없이 했다. <고향의 봄> 노래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라는 가사의 '꽃 대궐‘이라는 표현을 온몸으로 느낀 여행이었다.
매일 봐도 질리지 않고 볼 때마다 감탄하게 만들어주는 풍경은 자연밖에 없을 거 같다. 특히 벚꽃 풍경이라니! 세상이 아름답고 그런 세상을 누릴 수 있는 인생이 아름답다는 느낌을 한껏 들이마시고 왔다.
그렇게 좋았던 여행이라 사진을 자주 찾아본다. 특히 색감이 예쁜 사진은 그리고 싶은 욕구를 마구 일으켜 여러 장 그렸다. 가장 최근에 그린 그림은 스타벅스 대릉원점이다. 첨성대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로 경주의 느낌을 살려 만들어졌다.
경주의 고즈넉하고 조용한 풍경에 어울리는 공들여 만든 기와지붕과 단청이 예쁘다. 장식이 많고 단청의 색이 복잡해 그릴 엄두가 나지 않아 몇 날 며칠 째려보기만 하다 결심을 하고 그리기 시작했다. 장식 하나에도 손이 정말 많이 갔다. 그래도 그 과정 하나하나 명상하듯 집중하는 기분이 좋았다.
경주 스타벅스 그림을 그리면서 그게 지금의 나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다른 건물들처럼 진짜 오래되진 않았지만 오랜 전 기억과 느낌을 살려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만든 독특한 느낌이 중년의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히 새롭기만 한 것도 아니고 예전 것들을 주변 환경과 잘 어우러지도록 새롭게 해석한 모습이 그랬다.
젊음만이 찬란하고 아름답다는 편견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젊음 그 한가운데 있을 때는 그것의 아름다움과 빛남을 정작 본인은 잘 모른다. 지나고 나서야 안다. 오히려 중, 노년에 젊음의 빛을 깨닫고 인생의 향기를 진하게 맡을 수 있다.
이런저런 추억과 상상이 덧붙여져 더 깊어진 인생을 느낀다. 중년의 장점이다. 어리고 젊을 때는 그걸 모른다. 설익은 인생의 맛이 씁쓸하고 아직 여물지 못해 딱딱해서 힘이 든다. 제대로 음미하는 법을 몰라 서툴고 그 서툼을 들키기 싫어 굳이 먹고 싶지 않은 척하느라 인생을 제대로 맛보지 못하기도 한다.
인생을 재구성하고 진정한 의미의 단물을 맛볼 수 있는 시간은 지금이다. 유튜브에서 알 수 없는 알고리즘으로 뜬 1970~80년대 서울의 모습을 봤다. 그 아련한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슬프기도 하면서 좋았다. 오래된 집들이 그렇게 예뻐서 자꾸 그리는 이유와 같다.
얼마 전 저녁을 너무 많이 먹어 아들과 동네 산책을 했다. 우리 동네는 구도심의 느낌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아파트 아래쪽으로 가보니 내가 살던 80년대 집 같은 빨간 벽돌집들이 많았다. 난 ‘여기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너무 예쁘다’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아들은 그런 나를 보며 저런 집들이 진짜 예쁘냐고 낡아서 지저분하고 이상해 보인다고 했다. 현재의 그 집 상태만을 본다면 그냥 낡아빠진 지저분한 집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에게는 그 집의 현재 모습만 보이지 않는다. 어릴 때 살던 집이 겹쳐 보이고 나와 부모님, 친구들과 지내던 당시의 느낌이 와락 달려든다. 그 기억과 추억의 필터가 끼워져 보이는 거였다. 평생 아파트에서만 산 아이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나의 기억들이 현재를 수놓는다. 과거의 기억과 추억이 지금의 것들을 좀 더 풍부하게 볼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포션이 더 큰 시기를 살고 있는 아이와 살아온 기억이 더 많은 중년의 내가 사물을 다르게 볼 수밖에 없다. 새로운 것을 볼 때 물리적인 그 대상만을 보기 어렵다. 과거의 것들이 얽혀 들면서 현상이 더 두텁고 풍부하게 느껴지는 거 같다.
옛날기억과 현재의 새로움이 합쳐져 나의 정체성이 만들어진다. 오래됐지만 잘 관리되어 새롭게 만들어도 그렇게 만들 수 없는 '세월이라는 장식'을 덧붙인 물건 같은 그런 아름다움을 갖은 사람으로 늙어가고 싶다.
나의 기억과 추억이 아집으로 변하지 않도록 반질반질 윤이 나게 때를 닦고 좋은 것만 남겨 새로운 기억이 잘 얹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세월의 때가 아니라 세월의 장식이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