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향의 문제
어느 날 그림 속 새를 보고 처음으로 새가 아름답다는 걸 알게 됐다. 그전 내 세상에서 새는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어느 날 인테리어 책 속 새 그림을 보고 너무 예쁘다는 걸 깨달았다. 그 이후 내 세상에 새가 나타났고 자세히 보게 됐다. 자세히 보니 새는 정말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춘 존재였다.
천둥오리의 벨벳느낌의 파란색, 초록색 깃털은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현란한 원색의 조합도 멋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앵무새와 이 세상 귀여움이 아닌 박새의 사랑스러움도 알게 됐다. 블루제이의 선명한 파란색 무늬는 장난꾸러기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게 새를 찾아보며 언젠가 나도 새를 한 번 그려보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새나 동물을 그리는 건 생각보다 어려워서 몇 번 시도하다 그만두곤 했다. 다른 것들은 자주 그리면서도 정작 제일 좋아하는 새나 동물 그림은 그리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이젠 정말 한 번 그려보자. 망치면 망치는 거지’ 하고 새 도감을 펼쳤다. 그냥 새만 그리는 것보다는 예쁜 찻잔과 같이 그리면 예쁘겠다는 아이디어도 떠올랐다.
결혼할 때 산 로열 알버트 찻잔이 있다. 처음에는 집에 있는 진짜 빈티지가 된 30년 된 그 찻잔을 그릴까도 생각했는데 너무 오래 봐와서 좀 지겹기도 해서 다른 찻잔들을 검색해서 그렸다.
다음엔 그 찻잔과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새를 찾았다. 색 조합과 생김새 등등을 고려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새를 그렸다. 처음엔 진박새를 그렸는데 생각보다 귀엽고 깃털의 느낌이 잘 살게 그려졌다.
찻잔 그림엔 부족한 부분이 여러 군데 눈에 띄었지만 새 그림은 어느 정도 맘에 들어 기뻤다. 그렇게 처음 그린 새 그림을 브런치 대문 사진으로 바꿨다. 그 뒤에도 계속 찻잔을 찾아 검색하고 새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직은 더 그려볼 만큼 재밌다.
평소 무심히 보고 지나치는 사물의 아름다움을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고 깨닫는 일이 많다. 그들의 작품이 내 마음을 움직여 내가 좋아하는 게 뭐였는지 깨닫고 그 길로 더 가보게 만들어준다. 자연환경과 생물, 사물의 디테일과 아름다움이 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남들이 미처 눈치채지 못한 아름다움을 예술가들이 꺼내어 잘 묘사해 보여줄 때 비로소 내 눈에 띈다. 그림과 다른 모든 예술의 중요한 역할이다. 누군가 그린 일상의 물건, 새와 동물, 건물과 그 건물의 문과 창문, 식물의 그림들과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문장들, 음악 같은 예술품들이 세상에 색을 더해준다.
난 오래전부터 작고 귀여운 것들을 찾아내고 즐거워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사실을 오랫동안 수치스러워했다. 사회과학 책이나, 철학책, 수준 높은 문학책을 읽다 보면 소박한 일상의 소소한 놀이나 물건들, 만화 같은 그림을 좋아하는 내 취향이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들을 향유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수준을 더 높여야 해, 더 위엔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고 사람들은 내가 소녀 취향이라며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인 듯한 뉘앙스로 하는 말이 듣기 싫었다.
지금은 귀여운 것과 세밀한 것을 좋아하는 소녀 취향이 내 취향이고 그게 나라는 걸 받아들였다. 이렇게 소소한 글을 쓰고 사소한 그림을 그리는 일이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고 내가 나로 존재하게 만들어준다는 걸 느낀다.
얼마 전 호랑님이 쓰신 옥춘당이라는 제사에 주로 쓰이는 사탕에 관한 글을 보며 오래전 기억이 떠올라 한참 행복하고 아련한 기분에 빠져들었었다. 할머니, 부모님도 생각나고 큰집이라 제사와 여러 행사들로 늘 북적였던 나의 유년기의 기억이 잠시 날 행복하게도 슬프게도 만들어줬다. 그런 기억을 꺼내보고 내 인생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새기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런 일을 하는 글과 그림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누군가의 새 그림이 오랜 시간 마음에 남아 매일 새 그림을 그리며 인생의 한 페이지를 만들 기회를 얻기도 한다. 지금까지 늘 쟁반 같고 옥토끼가 사는 둥근달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나만의 달로 만들 기회를 준 알랭 드 보통의 한 줄 글귀에서 의미를 찾는 일이 돈을 벌고 좋은 직업을 갖는 일 못지않은 중요하고 심각한 일이었다.
더 위급하고 진지한 중요한 일이 따로 있지 않다. 늘 나의 취향이나 이런 작은 것들에 호들갑스러운 표현이 바로 튀어나오는 내가 수치스럽고 주책 같다는 생각에 좀 더 쿨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그건 내가 아니었다. 한결같은 내 취향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냥 ‘이게 나다. 이게 난데 뭐 어쩌라고’ 정신으로 자신 있게 살아야겠다.
사람들의 취향에도 급이 있는 듯 은근히 높이거나 폄하하는 분위기가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명품 같은 고급 상품을 얼마나 많이 알고 소비해 봤는지가 기준이 되기도 한다. 좀 더 세부적인 다양한 평가를 하기보다는 점점 획일화되는 느낌이 든다. 좀 더 희귀하고 고급스러운 물건을 누가 먼저 소비하는지 경쟁하는 거 같다.
유행에서 비껴 나 내 취향을 따른다는 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내 취향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유행이 한 참 지난 명품의 모방품일 수도 있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의 에피소드처럼
아비투스라는 책에서는 어떤 한 사람의 취향이 그의 사회문화적 배경, 부모님의 가치관과 태도, 경험치, 경제력 등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예전 귀족들의 어려서부터 높은 수준의 예술품 같은 가구와 인테리어에 둘러싸여 살면서 높아진 안목이 결코 한 개인의 천재적 재능만은 아님을 알게 됐다. 그래선지 나의 조금은 유치한 소녀 취향이 결코 자랑스럽지 않았다.
반면 최근에 인스타그램을 보면 미니어처나 인형을 좋아하는 자신을 인정하고 깊이 몰입해 예술로 승화해 내는 사람들을 본다. 난 플레이모빌이나 실바니아 집 같은 장난감도 굉장히 좋아한다. 미니멀 라이프한다고 다 처분했다 오랫동안 후회하며 다른 사람들의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을 보며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당당히 따라가고 쫓아가야 한다. 그 끝에 내가 있고 내 일과 내 삶이 있는 거였다. 많은 사람들이 멋지다고 인정하는 걸 따라가 봤자 내 마음에서 우러나는 게 아니기에 3류 아니 4류, 5류도 되지 못한다. 주류에 끼지 못하더라도 나로 살고 내 취향을 따라야 한다. 그게 옳은 길이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처음엔 어설프고 조악해 보여도 한 인간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을 찾아가다 보면 분명히 새로운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내가 오랜 시간 좋아했던 것에는 그런 의미가 있었다. 그런 것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행복감과 세상이 넓어지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사람만의 스토리가 있다. 그 취향이 귀족적 아비투스에서 나온 대단한 것이 아닐지라도 오랜 시간 내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은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기에 좀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 귀족이 이미 사용하고 버린 유행의 한 조각이라도 한 인간의 인생 스토리가 스며들면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생겨날 테니 말이다.
새의 깃털의 선명한 색들에 매료되고 개와 고양이의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귀엽다는 말로도 부족한 그 멍한 듯 세상에 초연한 표정들, 특히 고양이의 신비로운 눈의 모양과 색을 바라보는 게 너무 좋다.
동물들 특유의 무심함과 거기에서 나오는 웃음을 만드는 귀여움은 내 일상 속 한 줄기 기쁨이다. 볼수록 오묘하고 만든다고 해도 그렇게 만들 수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이 보인다.
그런 것들 속에서 행복을 찾고 작은 기쁨을 찾는 일이 시시한 일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하고 진지한 일은 뭐란 말인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을 갖는 일? 돈을 많이 버는 것? 그런 일에 시간을 쓰고 이루어 내는 일은 의미 있고 새의 깃털을 바라보거나 귀여운 물건을 수집하는 일은 시시한 일인가? 오글거리는 유치한 소녀 감성인가?
이런 고민을 많이 했었고 겨울왕국의 엘사가 자신의 능력을 숨긴 것처럼 내 취향을 숨기기 위해 노력했었다. 하지만 결국 난 이 일로 나의 행복과 의미를 찾았다. 이젠 더 이상 부끄럽지 않고 숨기고 싶지 않다. 이런 사소한 것에 매달리고 좋아하는 것이 나라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제야 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