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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종 Dec 20. 2024

카드를 만드는 마음

잘 자고 일어난 세상과 피곤한데 잠까지 못 자고 일어난 날의 세상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몸이 정신을 지배하는 게 맞는 거 같다.


인간의 의지가 발휘되는 일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 그래서 새나라의 어린이처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건강하게 먹고 TV나 스마트폰을 많이 보지 않아야 한다. 나가서 좋은 공기를 마시며 산책해야 하고 나에게 자꾸 해로운 말을 해서 기분을 엉망으로 만드는 사람들과 거리를 둬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정신력으로 극복될 줄 알았다. 의지로 해나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몸이 안 좋거나 잠을 거의 못 잔 날은 자꾸 짜증을 내게 되고 세상이 비관적으로 느껴지며 살 의욕이 사라질 수도 있다.


요즘 계속 위층에서 늦은 밤 안방 텔레비전 보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린다. 이사 오고 계속된 일이다. 겨울철에 심하게 들리는데 요 며칠간은 특히 심했다. 무슨 노래를 듣는지, 블록버스터 풍의 요란한 액션영화를 보는지, 뉴스를 보는지가 다 들릴 정도다. 음악 프로는 아닌 거 같고 스피커가 좋은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트로트 노래들이 긴 시간 들릴 때도 있다.


노부부가 사는 집이라 다른 소음은 없기에 그저 잠이 안 오시니 저렇게 밤에 음악도 듣고 텔레비전을 보시는구나 생각하며 이해하기를 3년, 요즘 소리가 점점 커지고 너무 늦은 밤에 새벽 1~2까지 이어지다 보니 이제는 참기 힘들어졌다.


경비아저씨께 좀 말씀드려 달라고 부탁드려도 그게 아랫집일 수도 있고 옆집일 수도 있다며 말하기 부담스러워하셨다.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 참고 있다.


그제에는 너무 심하게 새벽 2시까지 이어지는 영화소리, 음악소리에 피곤한데도 신경이 예민해져 거의 잠을 못 자고 모임에 나갔다. 좋은 사람들과의 즐거운 시간이었음에도 순간순간 그림은 그려서 뭐 하나 라는 생각과 브런치에 있는 내 글들에 대한 수치심이 들면서 당장 집에 가면 싹 다 지워버려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즐거운 와중에 비관적이고 우울한 호르몬이 날 서서히 잠식해 가는 느낌이 들었다. 모임을 마치고 집에 와서도 배가 부른데도 이상하게 뭔가를 자꾸 먹게 되고 내내 텔레비전만 보다 잠이 들었다.


그렇게 꿈도 꾸지 않고 푹 자고 일어난 오늘 아침은 어제의 나와는 다른 소녀같이 젊어진 느낌의 내가 있었다. 다시 힘이 채워지고 나가서 글을 써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계속해야지’라는 긍정 마인드가 살아났다.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잘 먹이고 보송한 잠자리에서 잘 재우고 사랑을 담은 예쁜 말 몇 마디가 인간에게는 다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쉽고 단순한 보살핌을 받지 못해 평생 황폐한 내면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지금부터라도 날 위해 좋은 질감의 잠옷을 입히고 침실을 아늑하고 포근하게 관리하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말을 많이 들려줘야겠다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젊을 때는 그런 책 속의 이야기들이 말도 안 되고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게 삶의 근간이라는 걸 절실히 깨닫는다. 기분이 전부다. 나의 기분을 늘 살피고 어루만져주고 자식을 돌보듯이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서 데려다 놓고 잘 돌봐야 한다.


엄지혜 작가의 <까다롭게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책에 보면 “ ‘이 사람이랑 있으면 내가 좀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아 ‘라는 감정은 관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지점인데, 반대로 ’이 사람과 대화하면 내가 자꾸 나쁜 사람이 돼 ‘같은 감정으로는 결코 좋은 관계를 만들어갈 수 없다. 사람의 죄책감을 건드리는 관계는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반면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사람은 자꾸 보고 싶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사람의 기분이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관계에서 이렇게 죄책감을 건드리는 사람과는 거리를 두는 게 좋다. 반면 내가 괜찮은 사람인 거 같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의미 있는 일이라는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 소중하다.


원래 나는 입에 발린 칭찬을 하지 못했고 누군가 그런 사람이 있으면 좀 경계하는 편이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 아니면 나쁘다고 생각했기에 칭찬이나 좋은 말에 인색한 편이었다. 그게 틀린 건 아니지만 진심 어린 한 마디를 해주는 사람들에게 큰 힘을 받고 있기에 그 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예전에는 칭찬할 거리를 발견하고도 순간적 생각이라 그냥 지나쳐버리는 일이 많았다. 우리나라 사람들 정서상 막 칭찬을 하는 거에 익숙하지도 않고 듣는 사람도 쑥스러워하는 경우도 많아 그냥 그렇게 지나갔는데 내가 그런 칭찬과 응원을 들을 때 생각보다 큰 힘을 받는다는 걸 브런치를 하면서도 알게 되었다.


주변의 몇 명 친구들과 후배들이 내 글과 그림에 공감과 칭찬을 보내줄 때 많은 힘을 받았다. 그들 덕분에 지금까지 계속 글을 올릴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작은 관심과 칭찬이 때로는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은 그렇게 한없이 섬세하고 연약한 존재다. 지금은 칭찬할 거리가 보이는 순간을 결코 놓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걸 기억하고 있다가 나중에라도 그 마음을 전해주려고 한다. 쑥스럽기도 하고 ‘굳이 이제 말해 뭐 할까?’라는 예전 사고방식이 방해를 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굳이 그렇게 한다.


굳이 그렇게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힘을 받았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작은 보석을 서로 주고받으며 환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살만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작은 것들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알게 된다. 나의 무심함도 깨달았다. ‘내가 너에게 관심이 있고 좋아하는데 그러면 됐지. 알고 있겠지.’라는 마음으로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 적이 많았다. ‘꼭 말을 해야 아나?’ 이런 생각이 여전히 강했다. 그런데 상처받고 힘든 사람에게는 그거로는 부족했다. 꺼내기 껄끄러운 말도 꺼내서 세심하게 위로하고 관심을 표현해야 한다. 그 한마디에 나락에 있는 사람을 끌어올릴 수도 있는 큰 힘이 있다는 걸 알았다.


지금부터는 쑥스러워도 내가 느끼는 상대의 좋은 점과 멋진 점을 끝없이 이야기해주려고 한다. 그 한마디가 그의 하루를 조금은 살만하다고 느끼게 만들어준다면 해 볼 만하지 않은가?


내 그림에 특히 관심과 지지를 많이 보내주는 친구들에게 카드를 만들어줬다. 그들에게 주는 카드를 만들 때는 정말 감사하고 좋은 마음이라 힘들 줄도 모르고 저녁밥 먹는 것도 잊은 채 4시간 이상을 집중해서 만들었다. 이 카드를 받고 좋아해 줄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을 담아 만들었다.

만든 카드들

사실 그림 그리는 게 재밌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 연필로 먼저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펜으로 선을 따고 지우개로 지운 후 색칠을 하는 3단계를 거친다. 그러다 보니 작은 카드 한 장도 1시간 이상이 걸리는 작업이다.


그 정성을 알아주고 감동을 표현해 주는 애들이라 사실 힘든 줄 모르고 만들었다. 다 만들고 나서야 어깨가 쑤시고 눈이 침침하고 기운이 쪽 빠졌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그 카드를 받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도리어 내가 선물을 받은 듯 행복해졌다. 그들이 그동안 나에게 보내준 관심과 응원에 아주 조금 감사의 마음을 돌려주었을 뿐인데 나까지 행복해졌다.


내 주변의 좋은 사람들에게도 다 만들어주고 싶은데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라 조금 엄두가 나진 않지만 용기를 내봐야겠다. 그들의 잠깐의 좋은 기분을 위해서도 그건 할 만한 일이라는 걸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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