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나에게는 존재하지도 않던 세상이 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 작가들에 의해 포착돼 영화나 책, 음악, 화폭에 표현되는 그 세계를 하나씩 찾아내는 것이 흥미롭다. 지금까지 나에게는 속하지 않던 세계를 조금씩 알아나가면서 이 세상이 얼마나 넓고 아름다운지 깨닫는다.
우연히 인테리어 사진에서 본 새 그림이 예뻐서 다른 그림들을 찾다 보니 새에 관심이 생겼다. 그동안 새라면 비둘기의 혐오스러움만을 떠올렸는데 지금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새들도 다시 보게 된다. 까마귀가 얼마나 크고 새카만지 큰 날개를 펴고 나는 모습이 얼마나 멋진지 감탄하고 참새보다는 크고 까치보다는 작은 이름도 알 수 없는 새의 정체를 궁금해한다. 그림을 그린다 해도 그대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색을 자랑하는 깃털의 새 사진을 찾아본다.
그림에서 시작된 새에 대한 관심이 평생 새를 관찰하는 삶을 사는 조류학자나 다큐멘터리 피디들의 세계도 엿보게 해 주었다. 새가 나타나는 순간을 인내심 있게 기다리는 새 학자들의 호기심은 어떤 종류일까? 그 열정은 어디서부터 생겨났을까 궁금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그렇게 나의 작은 관심을 따라가다 보면 다양한 삶의 모습과 사는 방법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나도 새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고 그림으로도 그려보고 싶어 새 도감을 사 볼 생각이다. 새의 세상, 전 세계의 건축물, 문과 창문, 이름 모를 들꽃의 세계 등 그동안 내 눈에 전혀 포착되지 않았던 무궁무진한 세상이 숨어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찾아보는 일은 나의 세상을 넓히는 방법이다.
그리고 싶은 것을 찾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낡아빠진 허름한 가게일 뿐인 건물도 나에게는 그림으로 변환되면 어느 부분이 예쁠지가 보인다.
스타벅스의 새로 나온 해리포터 케이크의 색 조합이 예뻐서 그렸더니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 자꾸 웃음이 나왔다. 남편은 맛있다며 먹기에 바쁜데 난 해리포터 속 9¾ 기차역을 생각하며 먹다 보니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내 그림으로 어릴 적 해리포터를 좋아했던 아이들과 대화거리가 생기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부모로서 일방적으로 영향을 주기만 한 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이들과 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나는 해리포터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는데 큰 애가 해리포터 시리즈를 많이 좋아했다. 영화뿐 아니라 책도 좋아해서 원문까지 구해서 읽고 들었다. 해리포터 원문을 아침마다 듣고 또 듣고 영화도 반복해서 보자 어느 순간 귀가 트였는지 영화 속 대사를 똑같이 따라 했다.
그렇게 한 세계에 푹 빠지는 경험은 아주 중요하다. 아이들이 그런 세계에 빠질 때마다 나도 같이 어릴 적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을 경험하기도 했다. 둘째는 공룡과 자동차, 기차를 그렇게 좋아해서 나도 공룡의 이름과 그 시대의 특징, 나중에 조류로 진화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다. 아이들 덕분에 나의 관심사가 넓어졌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화 속 판타지 세상과 평생 관심 가질 일 없을 것 같던 공룡과 기차, 자동차를 같이 알아보다 보니 피상적으로 알 때와는 다른 매력이 보였고 재밌었다. 그렇게 서로의 세상을 공유하면서 추억도 늘어났다. 요즘도 가끔 텔레비전에서 어릴 적 같이 보았던 영화나 애니메이션이 나오면 말하지 않아도 그때의 기분과 느낌으로 돌아간다. “ 생각나? 네가 너무 좋아해서 매일 봤잖아. 어떤 어떤 장면을 제일 좋아해서 흉내도 냈잖아.” 그러면 아이가 6살 때처럼 흉내 내며 웃고 같이 노래도 부르며 끝없이 이야기가 이어진다.
발터 벤야민의 <베를린의 유년시절> 중 “나비가 이리저리 날아다니던 그때의 그 공기”라던가, “오랜 세월 침묵은 그런 이름들을 신성하게 만들었다”라고 표현하는 그런 공기와 세상을 아이와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숨겨진 다른 세상을 살짝 엿보고 어린 시절을 추억하면서 속세와는 다른 그런 공기의 흐름을 기억하고 세상을 넓혀갈 수 있는 눈과 마음을 갖게 만든 아이들과의 경험이 소중하다.
현실의 눈에 보이는 게 다인 단조로운 세상을 사는 일은 힘든다. 더 많은 세상에 연결될수록 더 많은 관심거리를 갖을수록 세상은 재밌고 살만하다. 내가 아직 메마르지 않고 관심 가는 것이 많이 남아있다는 게 행복하다.
수첩에 ‘새 도감 사기’, ‘해리포터 작품 속 영국의 모습, 성과 기차, 복장 찾아보기’라고 하고 싶은 일을 적어 내려가자 부자가 된 듯 마음이 풍요롭다. 내가 몰랐던 세계와 그 세계에 매료된 사람들이 파헤친 것들을 같이 구경하고 싶은 기대감이 든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면서 모든 것에 돋보기를 갖다 댄 듯 자세히 보게 된다. 그렇게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한 줄로 써도 될 만큼 단조로워 보이던 것도 자세히 보면 한 권의 책이 될 만큼의 스토리가 숨어있었다. 어떤 한 사람에게도, 어떤 사물 하나에도 그런 이야기가 숨어있다는 걸 깨닫게 되고 그 이야기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