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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책 읽고, 2년 글 쓰고, 6개월 그림 그리기

by 박수종

1년에 100권 넘는 책을 읽은 지 10년이 넘어간다. 읽은 책의 권수가 늘어나다 보니 어느 순간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넘쳐나는 순간이 찾아왔고 2년 6개월간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다 보니 나를 더 잘 알게 되면서 좋아하는 것과 오랫동안 마음속 깊이 품고 있던 것들이 저절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를 알고 원하는 것들을 따라가다 보니 거기에 그림이 있었다. 6개월 전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게 그저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해서 늘 책과 가깝게 지내기는 했지만 결혼과 육아, 일을 하느라 잠시 멀리했었다. 그러다 몇 권의 책이 크게 와닿는 경험을 한 후 다시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주로 소설을 읽었는데 새롭게 읽기 시작한 심리학책과 영성책, 실용서들이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경험을 하며 깊이 빠져들었다. 처음 읽은 실용서인 청소력과 미니멀라이프에 관한 책들과 마음 챙김 책들은 그야말로 도끼로 머리를 내리치는 거 같은 강한 깨우침을 줬다. 그 책들이 나를 움직이게 해 집도 정리하고 마음 정리까지 할 수 있었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책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게 도와주고 상처를 치유하고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해주었다. 현실에서 받기 힘든 실질적인 도움을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스승들에게 얻었다.


한 분야에서 책을 낼 정도의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는 스승님들, 한 권이라도 책을 내기 위한 무수한 고민을 해 온 사람들의 글 속엔 배울 것이 많았다. 학교나 주변 사람들에게 배울 수 없는 귀한 지혜를 차분하게 듣고 삶에 적용해 볼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며 내 문제와 고통스러운 이유가 뭔지,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하는지를 배웠다. 습관적으로 하던 생각과 행동의 순간을 깨닫고 의식적으로 더 나은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자 어느 순가 세상이 달라지는 경험을 했다. 자식들의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님을, 사람들이 이상한 게 아님을, 더 아름답고 풍요로운 세상이 이미 있었음을 끝없이 배우고 또 배우고 있다.


새롭게 알게 되고 깨달은 것이 많아지자 그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가득 차올랐다. 그 마음을 따라 가끔 카페에 가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글을 쓰기 시작하자 신기하게 더 본격적으로 쓸 수 있는 곳이 홀연히 나타났다. 바로 브런치였다! 나 혼자서 쓰는 글은 한계가 있었고 답답한 마음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는데 이런 열린 공간에 글을 쓰자 정기적으로 정련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브런치에서 사람들이 보여주는 작은 관심과 댓글도 계속 글을 써나가는데 큰 힘이 된다. 가까운 사람들과 더 친밀한 대화의 장을 열어주기도 했고 나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도 좋았다.


글을 쓰니 나의 문제들을 잘 정리해서 홀가분하게 떠나보낼 수 있었고, 좋은 생각들이 정리되면서 내 진짜 모습이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것들, 어린 시절부터 품고 있던 아련한 꿈들을 써나가자 내 꿈이 점점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들, 삶의 모습들, 그런 것들이 모아지자 앞으로 내가 살고 싶은 삶의 형태가 선명해졌다. 이렇게 책 읽고, 글 쓰며 아름다운 것들을 모으고 만들어내는 삶이었다. 책과 글쓰기로도 충분했지만 더 깊이 들어가자 그림에 대한 오래된 꿈이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랬다. 어릴 때부터 늘 만화 같은 그림을 그렸고 언젠간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걸 기억해 냈다. 그냥 낙서 수준의 끄적거림이 다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조금 더 완성도 있는 그림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알 기회가 나에게 찾아왔다.


2년 전 글쓰기에 빠져있었던 것처럼 그림 생각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어떻게 하면 더 나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찾아보고 연구하고 연습하고 새로운 도구와 재료들을 실험해 보느라 분주하고 재밌는 나날을 보낸다.


그렇다고 글쓰기가 시들해진 건 아니다. 그림 그리는 과정 속 재밌는 생각과 실험들, 그림 설명을 글로 남기는 것 또한 너무나 재미있다.


이 모든 시작은 책이었다. 난 늘 책이 고맙다. 책은 항상 나에게 길을 알려줬고 힘을 줬다. 막막하고 두려울 때 사랑의 위로를 건넸다. 마음이 시리고 힘들 때 알맞은 책을 골라 아늑한 침대에 앉아 읽기 시작하면 다시 살 힘이 생겨났다. 현실 속 사람 보다 더 큰 힘으로 나를 감싸주고 내가 귀중한 사람이며 이겨낼 힘이 있는 대단한 존재라는 말을 들려줬다.


나에게 꼭 맞는 듣고 싶은 말을 들려주는 존재다. 몇 백 년 전 사람들에게서, 가보지도 못한 먼 나라의 사람들에게서 친밀하고 정확한 위로를 받을 때가 많았다. 난 이제 삶이 두렵지 않다.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어렴풋이 보인다.


여전히 나를 넘어뜨릴 현실의 일들이 일어날 수 있고 날 실망시킬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한 일들이 얼마나 더 남아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해답을 알려줄 믿을 구석 하나를 갖고 있다는 든든함이 있다.


가족들이 무너질 때 나까지 무너지지 않고 가장 먼저 정신 차리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책에서 찾았다. 가장 먼저 정신 차려서 가족들에게 사랑의 힘을 보낼 수 있는 법을 배웠다.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은 책과 함께 하는 삶을 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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