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헤르멘헤세의 나로 존재하는 법을 읽고
“당신은 관조라는 단어를 들어보셨나요”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 봄'
우연히 읽게 된 책에서 이 단어를 보는 순간 잠시 책을 내려놓고 회상에 잠겼습니다. 무언가 관통당한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에 대한 마음이었을까요? 아님 인생 그 자체였을까요. 다급하게 과거의 추억 속을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관조는 부재하였습니다 지긋이 바라보던 순간마저도 고요하진 아니했습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눈앞의 것을 그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것이. 왠지 모를 공허함을 느끼던 중 문득 당신이 떠올라 편지를 씁니다. 아마 미안함 때문일 겁니다. 그간의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 비록 당신이 느끼지 못했을지라도요.
코웃음 칠 수도 있지만 그동안 내심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이해심이 많은 편이라고. 그러나 관조는 이해보다 큰 마음일 것입니다. 이해가 내가 쌓아 올려왔던 것들을 다시 재조립해 상대의 입장을 추측하는 것이라면
관조는 상대방이 쌓아 올린 것을 그저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주관을 갖기 시작한 때부터였을 겁니다. 관조가 가능했음에도 하지 않았던 시기 말입니다.
긴 세월 동안 쌓기만 했습니다. 비움 없이. 기한도 목적도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다양한 재료나 방식을 배우며 쌓아 올려 왔습니다. 지나고 돌아보니 공고한 나름의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오히려 이 세계 속에선 불만과 불안이 늘어났습니다. 세계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호시탐탐 전복의 기회를 노리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안심하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이면 어느새 문을 쾅쾅 두들기며 이를 방해했기에 무엇 하나 섣불리 허투루 넘기지 않았습니다. 사소한 눈빛, 말의 토시 하나, 다리를 꼬고 있는 방향까지도요. 보초를 서는 경비병처럼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습니다. 유난히 고요한 순간이면 더욱 마음을 놓지 않고 쌓아 올렸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관조는 용기입니다.
무엇이 튀어나오든 무방비로 포옹할 수 있는 용기
다시 관조의 자세로 당신을 봅니다. 지긋이 바라보면 나름의 운율이 생겨납니다. 또 한동안 보다 보면 무언가 피어나고 이후엔 귀여워 보이기 시작합니다
혀 짧은 소리 같은 물리적인 귀여움이라기 보단 측은지심입니다. 미친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유대감이랄까요
나름의 애정이 솟구칩니다. "그래 원래 아주 나쁜 건 없지"라고 되뇝니다. 속으로 말했지만 당신은 들었을 겁니다.
당신은 밖에 있으면서 동시에 나이기도 합니다.
나는 나를 통해 당신을 보고 당신을 통해 나를 봅니다. 싱클레어, 데미안, 카인, 아브락사스, 심지어 헤르만 헤세까지도
이제야 알았습니다. 왜 그토록 데미안을 읽어도 이해할 수 없었는지 아브락사스는 정녕 무엇이었는지
모두가 나였습니다.
관조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일찍이 더 늦기 전에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