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도 쉽지 않습니다 37
시간은 참으로 많은 것을 해결해 준다. 불과 8개월 전인가. 을지로 지하도를 걸으면서 기둥과 벽에 스스로 머리를 박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약을 먹고, 상담을 받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만 했다. 친구가 사 주는 점심을 먹으러 안국동에 갔다가 교보문고에서 처조카 선물을 사고는 바로 자살예방센터로 갔던 기억도 난다. 나보다 열 살도 넘게 어릴 것 같은 상담 직원 앞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며 이런저런 하소연을 했었다. 그건 고작 7개월 전의 일이다. 별거를 앞두고 아내와의 결혼 앨범과 액자를 정리해서 차에 싣고 부모님 댁으로 내려가던 그날에는 또 얼마나 울었던가. 돌이켜 보면 5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아내와 별거를 시작한지는 5개월도 되지 않은 일이고, 이혼신고서를 접수한 건 2개월도 안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혼을 확정한 것도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은 일이다. 믿기지가 않는다.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일이 있었다는 것이. 그리고 지금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그 순간에는 너무 힘들고 괴롭고 그 시간이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지만, 정말 의사 선생님이나 상담사 선생님, 또 내 주위 사람들이 이야기해 주었듯이 시간은 정말 많은 것을 낫게 해 주었다. 물론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 정말 시간이 낫게 해 준 것일까. 어쩌면 약 덕분은 아닐까. 용량을 조금 낮추긴 했지만 여전히 나는 아침에 4정, 점심에 2정, 저녁에 3정, 자기 전에 2정 하루에 모두 11정씩의 약을 먹고 있다. 약을 먹지 않아도 괜찮을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직 그 점은 확신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용량을 조금 낮춘 것처럼 앞으로도 조금씩 낮추고 나아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중학교 도덕 시간이었나. '된사람'과 '난사람'에 대해서 배웠다. '된사람'은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고, '난사람'은 말 그대로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유명한 사람을 일컫는다. 어찌 난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느냐만서도 그때만 해도 순수했던 내 마음에 나는 꼭 인격적으로 완성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호손의 소설 [큰바위 얼굴]에 나오는 주인공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랐고, 인생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스스로 그렇게 '된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여기지 않았나 싶다. 아마 이 브런치에도 몇 번 적었던 것 같다. 실은 나는 사회적 지위로는 '교수'라는 자리에 무척 욕심을 내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은 교수님도 많지만) 혐오의 대상이 될 만한 많은 교수들을 보면서 만약 내가 교수가 되었다면 꼭 저런 모습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결과적으로 지금 나는 때때로 실패한 인생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기도 하지만, 늘상 그 점만은 잊지 않고 있다. 나는 교수가 되지 않았던 덕분에 삶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깨우치고 성숙할 수 있었다는 것을. 요즘은 그렇게 이른 나이에 교수가 되는 일이 잘 없지만, 이른 나이가 아니더라도 아마 나는 교수가 되었다면 '소년급제'한 것처럼 으스대는 사람으로, 겸손함이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사람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은 겸손하게 산다는 뜻은 아니다.)
이혼과정에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과거를 돌이켰을 때 가장 힘든 점은 그 점이었다. 만약, 이혼하지 않았다면 나는 스스로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서 살았을까. 수많은 영화를 보면서 드라마를 보면서 간접체험을 하고, 여러 권의 책을 읽으면서 깨달음으로 거듭나 정말로 아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남편이 되었을까. 쉽게 그렇다고 답변할 자신이 없다. 당장 종교 문제만 해도 그렇다. 물론 종교 문제에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은 없지만 아내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고, 내가 이혼문제에 부닥치지 않았다면 아내를 따라 독실한 개신교 신자가 되었을지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회의적이다. 슬프고 안타깝지만 그렇다. 사람은 이렇게 꼭 직접 경험해야만 깨닫는 것이 있는가 보다.
여전히 내가 나에 대해 잘 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없지만, 이혼하면서 놀랐던 점 가운데 하나는 '내가 나에 대해 이렇게 모르고 살았다니' 하는 점이었다. 10년도 더 전, 아니 거의 20년에 가까운 예전 시간에 한 후배로부터 거절당했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 후배는 나와 1년여의 시간을 같이 보내주었다. 그때의 기억을 돌이켜 보면 후배는 나와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 내가 스스로 우리가 맞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고 포기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중에 시간이 흐른 뒤에야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고 나에게 말했었는데, 그건 후배가 잘못 생각한 게 아니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후배의 생각이 맞았다. 나는 아마 그 후배와 만나고, 혹시 결혼했더라도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 일이니 100%라는 것은 없지만 나와는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는 몰랐다 그것을. 나보다 더 어린 후배도 알았는데 나는 그 점을 거의 20년이 지나서야, 다른 여자, 곧 내 아내와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렇구나. 나는 나에 대해 엄청 잘 알고 사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자신에 대해 모를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지금은 나 스스로도 놀란다. 이렇게 나에 대해 몰랐다니. 어쩌면 평생 다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생각도 든다. 그냥 모르고 사는 편이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는 것.
교수가 되지 못한 덕분에 나는 난사람보다는 내가 순수한 어린 시절에 꿈꾸었던 된사람이 되는 쪽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행복해진 것은 아니다. 아내와의 이혼도 마찬가지다. 아내를 떠나 보내며 배우고 깨닫게 된 점이 많고 덕분에 스스로 성장하고 성숙해졌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더 행복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행복이라는 관점에서만 본다면 그냥 그렇게 계속 철 없는 남편으로 아내와 계속 사는 쪽이 더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게 아내를 희생시키면 안 되었겠지.
나는 늘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모두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시크릿]류의 자기계발서를 싫어하면서도 실은 그런 믿음이 나에게는 있었다. 내가 정말로 간절히 원하는 것은 꼭 이루어진다고. 한편으로는 이제는 그런 의구심도 든다. 그게 정말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었을지에 대한. 어쩌면 패배한 뒤의 스스로의 자기합리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그러나 어쨌든 순수했던 청소년 시절 내가 가장 바랐던 것은 죽기 전에는 인격적으로 가장 완성된 사람이 되어, 평생을 쉼 없이 성장하며 완성된 인간의 형태로 눈을 감는 것이었다. 그런 소원을 바란 결과 나는 내가 목적했던 직업도 갖지 못했고, 중간 과정에서 가정도 깨져 버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분명히 나는 1년 전보다, 몇 달 전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숙하고, 삶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는 것을 느낀다. 그 과정에서 '무엇무엇을 깨달았다'며 으스대지 않게 된 것 또한 덤이다.(설마 브런치에 쓰는 글을 보고 '이렇게 성장했다'고 으스댄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안 계시겠지요?)
지난 수요일부터 마지막 무료 상담을 시작했다. 벌써 네 번째 기관에서 하는 상담이다. 이제 이 상담까지 받고 나면 더 이상은 무료로 상담할 수 있는 곳이 없다. 무료 상담 기관을 찾아다니다 보니 네 번째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셈인데 그래서 그런가. 이제는 상담을 마칠 때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고 해도 다음 달까지는 내내 받아야 한다. 지난주에 새로 간 병원에서 새로 만난 의사 선생님은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게 감정이 그렇게 격해지는 것 같진 않다고 말씀하셨다. 많이 나아졌다는 뜻이겠지. 새로운 병원에서는 이제 회복에만 집중하려고 한다. 그리고 약도 천천히 줄여나가야겠지. 낮에는 잠시 쉬면서 멍하니 휴대전화의 사진을 정리하고 있는데, 아내와의 첫 번째 결혼기념일 때의 사진이 몇 장 눈에 뜨였다. 나도, 아내도 모두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아내는 나도 기억하고 있는 붉은색 장난감 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고. 아마도 몇 달 전 같았으면, 아니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눈물이 펑펑 터졌을텐데, 예전의 기억과 추억이 떠오르긴 했지만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여전히 나는 생각한다. 앞으로도 몇 달 동안, 아내와 떨어진지 1년이 될 때까지는 내가 항상 시간과 장소의 기억에 갇혀 힘들어 할 것이라고.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올해 내 생일이 되면 아내가 차려 준 마지막 생일상이 떠오를 거고, 내년에 아내 생일이 오면 내가 아내에게 차려 주었던 마지막 생일상이 떠오를 거다. 그러나 그렇게 시간이 가다 보면 점차 추억이 옅어지고 괜찮아지는 날이 오겠지. 매년 광복절이면 아내의 할머님 생신잔치로 처가에 가곤 했다. 수십 분의 친척 분들이 오셨고 거기에서 나도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며 1년에 한 번 보는 처가의 친척들과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고는 했는데 지난 2017년 이후로 올해에 처음으로 할머님 생신잔치에 가지 않았다. 광복절은 가톨릭의 성모승천대축일이어서 그날도 성당에서 성가대 일원으로 미사를 드리고 성가를 불렀는데 불현듯 내가 광복절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깜짝 놀랐다. 약 덕분일 수도 있고, 시간 덕분일 수도 있다. 곧 있으면 장모님 생신도 돌아오는데 그 또한 아무렇지도 않게 보낼 수 있겠지?
9개월쯤 되었을까. 브런치에 처음 이혼에 대한 글을 남겼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만 해도 내가 정말 이혼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는데. 그리고 이렇게 이혼 관련 크리에이터로 거듭나게 될 줄도 꿈에도 미처 몰랐다. 다, 지나간 일이다. 좋은 추억과 기억이 머릿속에 남아 힘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안 좋은 기억보다는 좋다고 생각하련다. 아내는 이혼을 결심하면서 내게 '태도는 바뀌어도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했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도 태도라도 바뀐다면 그게 어딘가. 이혼하게 되면서 얻게 된 단 하나의 장점을 꼽는다면 그래도 이제는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려고 한다는 점이다. 진작 그랬다면 이혼하지 않았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미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을. 그저 앞으로라도 지금 깨닫고 배운 것들을 마음속에 잊지 않고 새기며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아내가 내게 준 마지막 보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