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을 다니면서 궁금했던 것이 있었다. 최근에 그런 종류의 책을 많이 읽게 되어서이기도 하고. 우울감이 심한 것과 정도가 약한 우울증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나는 원래부터 우울감은 좀 심한 편이라고 생각했기에, 꼭 병원을 다니고 약을 먹어야 하는가 싶은 의문이 들었다. 그끄저께는 의사 선생님을 만나서 직접 이 점을 여쭤 보았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그런 생각을 할 정도면 정말 많이 좋아진 거라고 긍정적으로 답하셨다. 다만 내 경우에는 심리검사 등을 보았을 때도 원래 우울감이 심한 사람이라고 보기는 힘들고, 지금은 우울장애를 겪고 있는 것이 맞단다.
평소의 나는 괜찮다. 어제도 성당에서 청년미사를 드리고 청년들과 같이 저녁을 먹고 자정까지 술자리에 함께 있었다. 시끌벅적 웃으며 이야기하고, 이런저런 진지한 이야기도 나눌 때면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고,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금세 잊는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의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 심지어 출근해서 회사에서는 다른 직원들과 아예 말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덕분에 약을 정말 많이 줄였다. 일단 먹는 횟수 자체가 하루 4회에서 2회로 줄었고 용량도 엄청 줄었다. 그런데 횟수도 줄고 용량도 줄인 까닭인가. 약을 먹고 싶단 생각이 드는 경우는 더 늘었다. 예전에는 끼니 때마다, 그리고 자기 전에 기계적으로 약을 먹었기 때문에 '지금 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지 않다. 많이 좋아졌다고 보시는 의사 선생님의 생각과는 다르게 '약이 필요하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는 도리어 많이 늘었고, 그래서 난 그동안 먹지 않고 쟁여 두었던 약을 요즘 야금야금 소진하는 중이다. 이제는 저용량 약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책을 읽고, 드라마를 시청하고, 영화를 보다 보면 울컥하는 때가 생각보다 많다. 누구에게나 다 그렇겠지만 모든 게 나의 이야기 같고, 또는 한때는 내가 경험했던 행복한 시절 같다. 그걸 지키지 못한 내가 원망스러워지고, 다시 그런 행복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면 깊은 우울감에 빠진다. 나는 정말 괜찮아졌고, 괜찮아지고 있을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얼굴이 많이 좋아졌고,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고 한다. 나 또한 그것을 느낀다. 지난해 이맘 때와 비교하면 정말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재작년 이맘 때와 비교했을 때도 내가 좋아졌나 생각해 보면 그건 아니다. 그리고 재작년 이맘 때, 더 멀리 가서 재재작년 이맘 때만큼 내가 좋아질 수 있을까를 떠올려 보면 쉽게 그렇게 될 자신이 없다.
누가 물었다. 그래서 나는 대답해 주었다. 나는 과거지향적인 사람이고, 아내는 미래지향적인 사람이라고. 그래서 아마 아내는 그렇게 힘들어 하지 않을 것 같고,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그랬더니 과거지향적인 사람의 장점은 무엇이 있겠냐고 하길래 어떤 사람이 '지난날을 통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거?'라고 말하는 것 아닌가. 아니다. 사람은 어리석기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똑같은 잘못을 계속한다. '그럼 과거지향적인 것의 장점이 없잖아요?' 그럼 물론이지. 과거지향적인 것의 장점은 없다. 유일하게 장점을 찾는다면, 기억력이 좋은 것 정도? 나는 주위 사람들이 소름 돋을 정도로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그런데 나는 기억이 감퇴되는 약을 먹고 싶다. 물론 실제로 그런 약을 먹게 되면 내가 잊고 싶은 기억뿐만 아니라 잊고 싶지 않은 기억도 잊게 될 거고, 삶에 수많은 부작용이 동반될 터라 실제로 그런 약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마 나는 그 약을 먹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같은 기억이 옅어지는 속도가 서너 배 이상 느린 나의 특성을 감안하면 그렇게 부분적으로라도 기억을 잊게 해 주는 약이 있어서 나를 좀 덜 힘들게 만들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금도 내가 그 약을 먹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여름까지도 의사 선생님께서 처방해 주신 약 중에는 '생각이 좀 덜 나게 하는 약'이 있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약을 훨씬 많이 먹었을 때임에도 힘들 때면 그 약을 더 찾아서 먹었던 기억이 나는데(그러고 보니 나는 내가 약을 찾고 있던 그 장면까지도 정확히 기억한다.) 다음에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께 다시 그 약을 구해 주실 수는 없는지 한 번 여쭈고 싶다.
좋은 추억은 좋은 추억으로 나를 눈물 짓게 하고, 잘못하거나 실수했던 기억은 또 그때 왜 그렇게밖에 하지 못했는지 나를 자책하게 해서 힘들다. 나는 여전히 괜찮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