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Sep 08. 2022

잘 안돼도 돼요

에필로그 | 마음을 지키며 연기하기

연기하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어떻게 하면 연기를 잘할 수 있나? 보다도, 어디까지가 최선일까 였다. 그런 건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누군가는 내게 너무 열심히 하는 게 문제라고 했고, 누군가는 내게 그 정도 가지고는 안 된다고 했다. 촬영이나 공연 하루 전 날, 자려고 누우면 ‘왠지 최선을 다 하지 않은 것 같아-!’라는 불안과 죄책감에 휩싸였다. 이상한 것은 열심히 하면 할수록 그 공포가 크게 번졌다는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뜨거웠던 마음은 한 김 식힌 듯 미지근해져서 이제야 정신이 드는 듯 나는 멀리서 스스로를 바라본다. 예전에는 결과에 의해 내가 최선을 다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했다면 요즘은 그보다도 과정 안에서 나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 결과물을 위해 나를 버리지는 않았는가, 내 마음이 수치와 자기혐오 사이를 부유하고 있지는 않은가- 마음이 수치와 혐오를 오고 가다보면 내가 이일의 어떤 부분에 마음을 빼앗겼는지를 완전히 잊게 된다. 가령 걸으며 대사를 읊는 일, 일상의 곳곳에서 인물을 발견하는 일, 연기할 때 예상치 못했던 감정과 순간을 만나는 일-


몇 달 전 다녀온 연기학원 면접에서 원장님은 내 이력서를 보시더니  ‘배우로도 잘되셔야 할 텐데’라고 했다.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잘 안돼도 돼요’라고 답했다. 원장님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다가, 이내 불쌍히 여겼다. 나의 대답이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보였나 보다. 그러나 그 답은 자포자기라기보다는 어떤 다짐이었다. 이제는 잘 된다는 것의 의미도 모르겠거니와 – 지금의 온도가 좋다고 생각했다. 잘 안돼도 돼요라고 말할 수 있는 온도. 누군가는 이 온도로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최선을 다했나 아닌가 보다도 - 결국에는 작업의 끝에 이 작업이 기뻤나 불행했나를 기억하게 될 것임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전에 중요했던 것들이 지금은 중요하지 않게 되고, 나의 한계를 일정 부분 받아들이니, 다른 사람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타인의 표정이 보이고 이야기가 들린다. 그 전에는 내 소리, 나의 이야기만으로 속이 시끄럽고 머리가 무거워서 자꾸만 내 앞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들을 서운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연기를 하며 인물을 만나는 것은 나를 비우고, 인물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배우들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무 뜨거울 때는 나를 비우는 것이 되지 않았다. 나로 가득 차서 내 앞의 상대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를 지켜보는 얼굴들이 내 시야에 너무 가득 차서.


가을이 왔다. 바쁜 하루가 끝난 날에는 몸이 지쳐있더라도 조금이라도 걸으려고 한다. 구겨진 내 얼굴을 펴고 다시 움직이려고- 나에게 최선은 나를 잃지 않고, 하고 싶은 마음을 지키며 해나가는 그 정도라고 말해주려고-

그리고 지친 동료들에게 따뜻하게 ‘잘 안돼도 돼요’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 말이 어쩌면 우리를 더 멀리 갈 수 있게 해 줄지 모른다는 부연 설명과 함께.




커버이미지는 하마구치류스케 감독님의 ‘해피아워’의 스틸컷입니다.
이전 14화 썰물의 시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