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11. 20 조성진, 사이먼 래틀 &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올해 가장 기대한 공연이다. 세 가지 지점이 모두 궁금했다. 래틀의 해석, 조성진의 피아노,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소리. 결과적으로 영상과 음원으로는 그 진가를 알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항상 리뷰를 남기는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다. 연주가 좋았다는 감정, 그 이유를 좀 더 깊이 생각해보고 싶어서다.
래틀의 해석
사이먼 래틀의 접근은 항상 창의적이다. '응? 여기를 이렇게 하시네?' 그걸 듣는 재미가 언제나 쏠쏠했다. 예를 들면 독일 사람들이 독일 작곡가를 바라볼 때 느낄 수 없는 것들을 보는 것이다. 그 관점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 하지만 BRSO의 첫날 연주에서는 그 이상의 것이 돋보였다. 바로 존중과 존경이다. 오케스트라 단원과 협연자에 대한 존중, 그리고 이들이 마리스 얀손스와 만들어놓은 음악에 대한 존경. 확실히 현장에서는 이런 것들이 더 잘 느껴진다. 이런 마음이 느껴져 버리면 뭐. 그냥 그때부터는 감동의 연속이 되곤 한다.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시원하게 연주해 버리기보다는 차근차근 짚어나가는 모습이었다. 중요한 부분들을 위해서 소리를 아끼고 절제하는 듯 보였다. 단원들과도 협연자와도 아주 내밀한 대화를 자주 나누는 모습이었다. 그들이 인지하고 있는 위험하거나 중요한 부분들을 냉정하고 차분하게 조율하는 것이다. 그런데 함께 만들어내는 소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특히 3악장에서의 지휘와 해석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브람스 교향곡 2번의 양상은 조금 달랐다. 지휘자도 오케스트라도 모두 너무 잘 알고 있는 레퍼토리다 보니 조금은 흘러가게 놔두는 모양새였다. 래틀의 브람스 해석은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시절부터 이미 검증되었고,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BRSO는 독일과 유럽을 대표하는 소리다. 지휘자는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 음악과 함께 흘러갔고, 그 자체로 너무 아름다웠다. 그러면서도 래틀은 때때로 악상의 대비를 강조했고, 오케스트라의 소리 질감을 다채롭게 표현했다. 덕분에 자극적이지 않고 웅장한 포르테와, 아주 세밀하고 폭신폭신한 피아노를 마음껏 감상했다.
조성진의 피아노
10월 초에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쇼스타코비치 연주. 10월 말은 빈 필하모닉과의 베토벤 연주. 11월은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의 브람스 연주다. 내 마음속에서는 이 3개의 악단이 세계 최고다. 이것만으로도 감격스럽다.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연주는 영상으로만 봤지만 3개를 다 보고 나니 분명해진 것이 있다. 조성진은 확실히 스마트한 연주자다.
세 악단은 스타일과 소리의 질감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게다가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던 파보 예르비, 안드리스 넬손스, 사이먼 래틀 세 사람 모두 쿨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점만이 비슷할 뿐, 음악의 결도 완전히 다르다. 그렇다면 협연자는 어떤 자세로 연주에 임해야 할까. 내가 보기에 조성진은 철저히 그들의 동료가 된다. 오케스트라에 맞서 싸우고 자신이 돋보이는 협연자가 아니라, 함께 음악을 만들고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곡이다. 조성진과 BRSO는 그들이 가진 모든 도구와 무기를 총동원했다. 그렇게 눈앞에 넓게 펼쳐진 소리들은 정말 황홀했다. '아, 이렇게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구나.' 감탄했다. 그러면서도 래틀과 조성진은 명쾌하고 논리적으로 음악에 접근했다. 1악장은 오케스트라의 젠틀한 사운드 위에 팡팡 터지는 듯한 피아노의 터치가 인상적이었다. 2악장은 당김음이 수두룩히 나오는 리드미컬한 부분과 그 안에 담긴 서정성이 함께 잘 드러났다. 3악장은 이 날의 연주 전체에서 가장 기대한 악장이었다. 밝은 색 나무를 떠올리게 하는 소리들의 연속이었다. 피아노는 이 음향 위에서 펼쳐지기보다는 어느새 슬며시 섞여 들어가 앙상블을 이루었다. 이후엔 전반적으로 분명하게 목소리를 냈지만, 필요한 부분에서는 다시금 경청하거나 철저히 조력자가 되었다. 4악장은 설레는 선율과 들썩들썩한 헝가리풍의 음악에 취하면서도, 피아노 연주에서는 테크닉적으로 어떻게 저렇게 화려한 스케일, 아르페지오, 옥타브를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을까 시종일관 감탄했다.
앙코르는 슈만의 숲의 정경 중 '외로운 꽃'이었다. 오른손의 섬세한 터치와 노래, 그보다 더 작고 폭신한 왼손의 터치와 서포트. 한쪽에는 꽃밭이 넓게 펼쳐져 있고, 다른 쪽에는 혼자 외로이 피어 있는 꽃을 음악으로 설명하는 듯했다. 쓸쓸하지만 그래서 아름다운 꽃.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소리
BRSO는 독일에서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TOP2 오케스트라로 인식된다. 북쪽을 대표하는 소리가 베를린 필하모닉이라면, 남쪽을 대표하는 소리는 BRSO다.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이들의 사운드는 어떤 것일까. 내가 BRSO의 소리를 자주 들었던 것은 독일 유학시절이었다. 볼 때마다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악상과 표현의 폭에 늘 놀랐고, 이들이 연주 자체에 집중하는 모습은 언제나 특별했다. 너무 오랜만에 보게 되어 설레는 마음을 안고 공연장에 갔다.
뮌헨에서의 공연과 이동, 긴 아시아 투어의 첫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쾌적한 컨디션으로 느껴졌다. 연주자들의 집중도가 굉장히 좋았다. 새로운 홀에서 울리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면서 앙상블을 맞춰나갔다. 이 날 연주한 브람스의 음악은 다성음악이었고, 다층적인 구조를 지녔다. BRSO는 다양한 방법으로 그 층위를 풍성하고 자세하게 보여주었다. 또한 개인들이 내는 소리는 모두 전체를 위한 소리였다. 즉, 사려 깊은 연주였다.
특히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의 3악장에서 첼로 솔로는 그런 면에서 훌륭했다. 파트 악보로 한 바닥이 넘는 분량의 솔로이고, 더 뽐내고 더 노래해도 될 솔로다. 그런데 첼로 수석 연주자는 그저 고즈넉하게 음악의 결대로 연주했다. 그 뒤를 따르는 바순과 오보에 연주도 놀라웠다. 첼로 소리보다 한 단계 아래에서 시작해서 슬며시 수면 위로 올라오듯 연주했다. 이들의 앙상블이 전체 악장의 분위기와 기조를 결정하면서 3악장 전체를 아름답게 만들었다.
현악기들은 높낮이만 다를 뿐 바이올린부터 콘트라베이스까지 음색과 질감이 일치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고풍스러운 음향 안에서 움직였다. 유난히 많이 등장한 피치카토 연주가 인상 깊었는데, 타이밍이 정확했고 음색은 풍성했다. 이 음향 안에서 움직일 수 있을까 생각한 목, 금관악기들의 연주도 대단했다. 얼굴만 보고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관악기 연주자들이 총출동했다. 한 악기에서 큰 흐름을 바꿀 정도로 유명한 관악기 주자 두 명만 이야기해 보자. 오보에 수석 라몬 오르테가 쿠에로와 호른 수석 카르스텐 더핀. 쿠에로는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을, 더핀은 브람스 교향곡을 연주했는데, 이 두 사람의 연주만 귀로 따라다녀도 나는 행복할 정도였다.
베토벤과 브루크너는 어떨까.
브람스를 이렇게 신나게 들었는데, 베토벤과 브루크너도 이 사운드로 들을 수 있다니.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