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머만, 쉬프 <오네게르, 마르티누, 바흐, 핀처, 라벨>
쉬프는 내 음악을 무척 잘 이해해주는 몇 안 되는 연주자였어요.
프랑크 페터 침머만은 첼리스트 하인리히 쉬프(Heinrich Schiff, 1951–2016)를 이렇게 떠올렸다. 두 사람은 성격도, 음색도 달랐지만, 음악에 접근하는 태도는 놀랄 만큼 닮아 있었던 연주자들이다. 두 사람에게 가장 먼저 느껴지는 건 확신에 찬 연주스타일과 집요한 해석력이다. 게다가 2016년 쉬프는 세상을 떠났다. 이 음반이 쉬프의 마지막 녹음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건강 문제로 무대에서 물러난 뒤 다시 녹음실로 돌아와 만든 몇 안 되는 작품이다.
피아노도, 오케스트라도 없이 바이올린과 첼로만으로 이루어진 듀오 음반은 흔하지 않다. 바이올린과 첼로라는 두 악기만으로 리듬과 화성, 서사와 감정을 모두 담아내야 한다. 이는 작곡가에게도 연주자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침머만과 쉬프는 ‘완성된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다. 서로를 밀어주고, 받아주고, 때로는 도발한다. 그런 시도들이 이 음반을 더욱 빛나게 만든다.
음반은 오네게르의 <소나티네 마단조, H.80>으로 시작한다. 오네게르는 참 매력적인 작곡가다. 그는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작곡가로 ‘프랑스 6인조(Le Groupe des Six)’ 중 한 명이다. 그의 음악은 고전적 형식을 활요하면서도 현대적 감각으로 가득하다. 이 작품 역시 그런 두가지 매력을 느껴보기에 매우 좋다. 보통 실내악 음반의 첫 트랙으로 선택되기엔 다소 낯선 곡이긴 하다. 그러나 워낙 호흡이 뛰어난 두 사람의 연주는 어느새 듣는 사람을 설득시킨다. 첫 악장 Allegro는 명쾌하고 단단하다. 두 번째 악장은 느림과 빠름을 오가는 구조인데, 침머만과 쉬프는 그 템포 변화를 부드럽게 연결하며 대화처럼 풀어낸다. 마지막 악장은 날렵한 리듬과 긴장감이 흐른다. 아주 매력적인 시작이다.
이어지는 <듀오 No.1, H.157>는 체코 출신의 작곡가 보후슬라프 마르티누의 작품이다. 그는 파리에서 활동하며 신고전주의 양식을 발전시켰고, 체코 민속음악의 색채와 현대적 리듬을 자연스럽게 결합하는 데 능했다. 마르티누는 언제나 리듬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특히 2악장 Rondo에서 그런 면모가 돋보인다. 침머만의 타이트한 보잉과 쉬프의 응답은 아주 잘 짜여져 있으면서도 동시에 즉흥적인 대화처럼 들린다. 여유로운 1악장에서의 텍스처 대비도 재밌다.
그 다음에는 바흐의 <푸가의 기법> 중 '캐논 16 (Duodecima)'과 '캐논 14 (alla Ottava)'가 등장한다. 현대곡에 낯설어하던 내 귀와 마음이 여기에서 편안하게 풀어진다. 두 개의 카논은 한편으로는 수학처럼 정교하지만, 들려오는 음악은 자유롭다. 이 두 트랙은 이 음반 전체의 중심을 잡으면서 두 연주자의 깊이를 경험하게 해준다. 정말 고풍스러운 카논을 즐길 수 있다.
바흐의 두 곡 사이에는 마이클 핀처(Michael Finnissy)의 <Study I for “Treatise on the Veil” (2004)>가 자리잡고 있다. 음반에서 가장 긴 트랙이면서, 가장 실험적인 곡이기도 하다. 이 곡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음향을 탐색한다. 아주 섬세한 표현들이 등장하고. 침묵과 반복, 스산한 분위기를 만든다. 침머만과 쉬프는 여기서 악기라는 도구를 넘어, 소리 그 자체를 어루만지듯 연주한다. 음반 전체를 듣고 나면, 이 곡이 음반의 중간에 배치된 것이 아주 중요하게 느껴진다. 전체가 일직선으로 흐르지 않고, 이 작품에서 음반 전체가 한 번 깊은 숨을 들이쉬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음반은 라벨의 명작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소나타 (1932)>로 이어진다. 이 곡은 두 사람이 가장 깊이 있는 소통을 보여주는 트랙이다. 1악장은 어딘가 모르게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로 시작한다. 침머만은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면서도, 소리를 밀어붙이지 않고 능숙하게 컨트롤 한다. 쉬프는 거기서 한 걸음 더 깊숙이 들어가 소리들을 만들어낸다. 피치카토를 주고받으며 시작하는 2악장 Très vif는 날렵하면서도 유머러스하다. 3악장 Lent에서는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음과 음 사이의 공백이 음악을 만든다. 마지막 악장 Vif, avec entrain에서는 모든 에너지가 열린 공간으로 쏟아져 나온다. 다 들은 뒤엔, 한 편의 연극을 본 듯한 잔상이 오래 남는다.
바이올린과 첼로에 피아노가 더해지면 수많은 레퍼토리들이 있다. 그러나 침머만과 쉬프는 피아노 없이 더 밀도 높은 대화를 하고 있다. 둘이 함께 만든 이 음반 전체에는 어떤 ‘공감’이 있다. 침머만의 정확한 톤과 쉬프의 깊은 울림은 서로에게 응답하며 끊임없이 확장된다. 둘 사이에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음악언어가 있다. 다 듣고 나면 마음 한편이 조용히 울린다. 이 음반 속 음악들은 분명 낯설지만, 다시 만나고 싶은 대화이자 세상이다. 이런 음반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쉽게 잊히지도 않는다.
Essential Track | 12번 트랙 (Ravel: Sonata for Violin & Cello, M. 73: IV. Vif, avec entrain)
두 사람이 함께 음악을 하고 있을 때의 즐거움과 자유로움이 가장 잘 느껴지는 곡이다. 음반 전체가 비교적 진지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지만, 이 곡에서는 마치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모습이 그려진다. 라벨 특유의 유머와 연주자들의 해석이 어우러져, 기분 좋은 가벼움이 음악 전체에 가득하다.
https://youtu.be/-7vzKMj5ToE?si=RceNQZ9XPcKFG8xQ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