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땅의 소리

파질 사이 <Black Earth>

by 안일구

프랑크푸르트에서 파질 사이의 연주를 들은 적이 있다. 프로그램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부드럽고 정갈한 음색, 직선적인 호흡과 날카로운 리듬의 긴장감. 그 짧은 순간만으로도, 이 피아니스트가 얼마나 정밀하고 풍부한 세계를 지녔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 감동은 앙코르에서 찾아왔다. 사이는 건반과 피아노 뚜껑 안쪽의 내부 현을 동시에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질적인 소리였다. 처음 듣는 곡이었다. 그런데 설명할 수 없는 몰입이 시작되었다. 태어나 들어본 적 없는 노래인데, 이상하게 익숙한 감정을 건드리는 그런 음악.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 곡이 Black Earth. 파질 사이의 자작곡이었다. 이후 유튜브에 내가 봤던 바로 그 연주 영상이 올라와 있고, 지금은 조회수 1000만을 넘겼다. 나만의 감동이 아니었음을 그 숫자가 증명해준다.


그는 연주자이자 작곡가다. 하지만 단순히 ‘둘 다 잘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그 둘이 자연스럽게 뒤섞인다. 누군가는 작곡할 때 연주자의 입장에서 악보를 쓰고, 또 누군가는 연주할 때 작곡가처럼 해석을 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파질 사이는 연주와 작곡을 구분하지 않는 것 같다. 피아노 앞에 앉은 순간, 악보를 보건 말건, 그는 음악을 만든다. 새로운 곡을 쓰든, 이미 유명한 곡들을 연주하든, 늘 ‘자기만의 방식’으로 음악을 대한다. 이 음반에는 바로 그런 그만의 방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의 연주는 느리거나 빠르거나 강하거나 부드럽거나 늘 명확하다. 음 하나하나의 무게와 방향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그의 연주가 단조롭거나 예측 가능하지 않은 이유는, 그 안에 담긴 감정이 언제나 직접적이고 진실하기 때문이다. 감정이 먼저 움직이고, 손이 그것을 따라간다. 그래서 그의 연주는 늘 ‘생생한’을 느낌을 남긴다. 기계처럼 완벽하지는 않아도, 인간적인 떨림이 있다. 이 음반을 통해 그의 자작곡을 들으면, 이 생생함이 훨씬 더 깊이 다가온다. 그가 누군가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음반의 제목이자, 첫 곡이면서 대표곡인 Black Earth는 터키의 전통 민요에서 출발한 곡이다. 그는 이 곡에서 피아노의 뚜껑을 열고, 건반을 누르는 동시에 내부의 현을 손으로 뜯는다. 이 낯선 연주 방식은 의미 없는 퍼포먼스가 아니다. 그 소리는 터키 전통 악기 ‘사즈’를 연상시킨다. 그 소리 하나 때문에 원초적인 느낌이 풍부해진다. 울퉁불퉁한 흙, 메마른 바람, 먼지가 휘날리는 대지. Black Earth는 제목 그대로 땅의 소리를 낸다. 그 땅은 바라보기 좋은 풍경이 아니라, 정체성이다. 고향을 떠난 이의 그리움이기도 하고, 한 민족의 근원적인 서사이기도 하다. 클래식 피아노로 이런 음악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보여주고 있다.



이 곡 하나만으로도, 이 음반은 충분히 들을 이유가 된다. 하지만 이 음반에는 파질 사이의 또 다른 면모들이 살아 숨 쉰다. 바이올린 소나타, 실크 로드 피아노 협주곡 같은 곡들은 내밀하고 개인적인 기억을 불러낸다. 유년 시절, 도시의 정취, 터키 민담과 전설. 그는 자신의 삶과 문화를 클래식 음악 언어로 옮기는 데 있어 조금도 망설임이 없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게 만든다. 낯선 세계지만, 낯설지 않은 감정. 이게 그의 음악이 가진 힘이다.


가장 인상적인 곡 중 하나는 음반의 마지막 트랙 Dervish in Manhattan 2000이다. 2000년 라디오 프랑스 & 몽펠리에 페스티벌에서의 라이브 연주로, 당시의 현장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다. 제목부터 이질적인 두 요소가 함께 놓인다. ‘데르비시’, 즉 수피 전통의 수행자와, 미국 뉴욕 맨해튼이라는 단어. 전통과 도시. 이 상반되는 이미지가 음악 안에서 부딪히기도 하고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곡은 수피 음악의 반복적인 리듬을 바탕으로 재즈의 스윙감과 자유로운 즉흥성을 더한다. 박자는 계속 바뀌고, 리듬은 끊임없이 당겨지고 밀린다. 어떻게 보면 가벼운 음악일 수 있지만 몰입도는 정말 높다.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클래식, 재즈, 터키음악 등의 장르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오직 파질 사이라는 이름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음악이다.


그는 자주 말한다. 바흐와 베토벤만큼 아트 테이텀(재즈 피아니스트)이나 라비 샹카르(인도 힌두스탄 음악가)에게도 영감을 받는다고.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실제로 그의 음악에는 그들의 영향이 뚜렷이 드러난다. 리듬의 유연함, 선율에 담긴 감정, 즉흥적인 흐름. 이 모든 것이 섞이는데, 결코 난잡하지 않다. 그는 혼란 속에서 하나의 질서를 만들 줄 안다. 여러 장르의 언어를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구조적 감각이 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늘 복합적인 정서와 현대적인 감각을 품으면서도 듣기 어렵지 않다. 파질 사이가 유럽 공연장에서 항상 환영받는 이유이다.


음반 전체를 관통하는 선율이 하나 있다. Balck Earth에서 등장한 후 여러 곡에서 반복되는 이 선율은 터키 민요 <Kara Toprak>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터키의 맹인 시인 겸 음악가 아쉬크 베이슬의 곡으로, 땅과 생명의 순환, 고향에 대한 깊은 정서를 담고 있다. 파질 사이는 이 선율을 통해 자신의 문화적 뿌리와 정체성을 끊임없이 되새긴다. 반복과 변형을 통해 명상적인 분위기와 감정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파질 사이에게 아마도 이 선율은 일종의 음악적 서명이다.


우리는 터키음악을 잘 모른다. 파질 사이의 음악은 처음 듣는 순간에는 낯설고 당황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마음을 열고 따라가면, 금새 그 안의 온도를 느끼게 된다. 정통 클래식만이 음악이라고 믿었던 사람에게는 새로운 문을 열어줄 것이고, 이미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깊은 울림을 줄 것이다. 나에게는 그랬다. 처음엔 몰랐고, 알 필요도 없었고, 다만 그 음악에 이끌렸다. 그리고 지금은 확신할 수 있다. 파질 사이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진짜다.


Essential Track | 6번 트랙 (Sonata for Violin and Piano: V. — (1997))

Black Earth가 물론 최고의 곡이라 할 수 있지만, 바이올린 소나타도 매력적이다. 총 5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이 곡은, 마지막 5악장에서 다시 1악장의 음악이 반복된다. 모든 악장은 제목 없이 ‘—’로만 표기되어 있고, 오직 소리로만 감정을 전한다. 특히 이 반복은 하나의 감정이 다시 돌아와 더 깊이 흔들리는 듯 하다. 바이올린은 때로 울부짖고, 때로 속삭이며, 피아노는 묵직한 섬세하게 그 감정을 받아낸다. 중동 음악 특유의 리듬과 재즈적인 하모니가 어우러지며, 극도로 불안정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명확한 결론 없이 감정이 소용돌이치다 사라지는 듯한 이 악장은, 그래서 더 길고 깊은 여운을 남긴다.

https://youtu.be/qh862ojowXk?si=m7w3znceWF02mHBc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