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훈 x RCO, 로미오와 줄리엣

정명훈, RCO <로미오와 줄리엣 모음곡>

by 안일구
Deutsche Grammophon, 1994
"Thus with a kiss I die."
"이렇게 키스를 남기고 나는 죽는다."
(5막 3장, 로미오)


정명훈.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 그리고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이 세 가지 이름만으로도,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충분히 설레는 조합이다. 하지만 이 음반은 그 이상의 무언가를 품고 있다. 여러 분위기와 감정이 요구되는 이 작품 안에서, 지휘자 정명훈은 놀랍도록 예리하게 균형을 잡는다. 여기에 로열 콘세르트헤바우가 가진 부드러우면서도 중후한 사운드, 유기적인 앙상블이 더해지면서 음악은 점점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1993년에 녹음된 이 작품은 원래 발레를 위한 모음곡이지만, 음악은 서사가 촘촘히 엮인 한 편의 음악극처럼 들린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관계에는 언제나 ‘궁합’이라는 것이 있다. 정명훈과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의 조합은 완벽한 조화를 보여주는 사례다. 지휘자가 원하는 사운드를 정확히 구현해내는 오케스트라, 그리고 그 사운드를 깊이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이끄는 지휘자. 이 둘의 만남은 서로에게 윈윈이다. 정명훈은 오페라 지휘자로서 오랜 경력을 쌓아온 음악가이다. 그의 실력은 전 세계 주요 극장에서 다각도로 입증되었으며, 마침내 세계 최고 수준의 무대인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음악감독으로도 활동하게 되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베르디와 푸치니, 슈트라우스는 물론, 비제와 풀랑크에 이르기까지. 그는 어떤 레퍼토리 앞에서도 오케스트라가 하나의 목소리를 내도록 이끌며, 각 인물의 감정선을 명확히 드러낸다.


그런 그가 다룬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록 발레를 위한 음악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오페라적인 접근을 보여준다. 프로코피예프의 이 작품은, 음악이 어떻게 이야기를 대신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사랑과 갈등, 운명의 전환과 절망까지. 이 모든 장면이 ‘말 없는 드라마’로 펼쳐진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RCO가 가진 소리들이 빛을 발한다. 이 오케스트라는 각 파트가 독립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공간감을 이용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정명훈의 해석과 이들의 사운드가 만나니, 이야기의 윤곽과 입체감이 더욱 선명해진다. 오랜 시간 다양한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춰온 정명훈이지만, RCO와는 감정의 온도가 잘 맞는 듯하다.


음악을 들어보면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그대로 옮긴 듯한 충실함보다는, 장면과 인물의 감정 흐름을 감각적으로 전달하려는 시도가 두드러진다. 각 악장은 독립적으로 들을 수 있으면서도, 전체를 감상하면 곡과 곡이 하나의 서사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프로코피예프는 리듬의 대비, 예기치 않은 조성의 전환, 날카롭고도 아름다운 선율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사랑을 둘러싼 긴장과 상처,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비극적인 운명까지, 이 음악에 담겨 있다. 곡들이 마치 하나의 영화 장면을 보는 것처럼 살아 움직인다.



이 음반에서는 크게 세 가지 감정이 차례로 펼쳐진다. 먼저, 두 가문 사이의 숨 막히는 긴장감이다. ‘몬테규가와 캐플릿가’, ‘거리의 싸움’, ‘검무’ 같은 곡에서는 갈등의 에너지가 그대로 음악에 실려 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분위기가 반전된다. ‘젊은 줄리엣’, ‘무도회에 간 줄리엣’,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 장면’에서는 두 사람의 설렘과 순수함, 프로코피예프 특유의 유머와 감성이 투명하게 빛난다. 맑은 선율 속에 행복과 애틋함이 함께 스며 있다. 마지막에는 말로 다 담기 어려운 깊은 슬픔이 찾아온다. ‘티볼트의 죽음’, ‘줄리엣의 무덤’, ‘줄리엣의 죽음’은 격정을 억누른 채, 깊은 울림을 남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멎은 숨결이 음악 속에 조용하게 살아 있는 듯하다.


또한 이 음반에서는 각각의 곡들의 원래 순서와 다르게 수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11번에 해당하는 ‘Arrival of the Guests(손님들의 도착)’과 13번의 ‘Dance of the Knights(기사들의 춤)’의 위치가 서로 바뀌어 수록되어 있다. 이는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인 편곡으로, 줄거리 순서보다 음반 전체의 흐름과 감정의 곡선을 고려해 재배열한 것이다. 특히 ‘기사들의 춤’은 작품 중 가장 유명하고 인상적인 곡인데, 제일 처음에 배치함으로써 극적인 긴장감을 높이고 음반의 중심을 앞쪽에 두었다. 발레 원곡과도, 프로코피예프의 모음곡 편성과도 순서가 다른 이 음반만의 재배치는, 전체 음악을 하나의 관현악극처럼 들리게 하는 중요한 장치다. 곡과 곡 사이의 흐름이 예상보다 매끄럽고, 감정의 곡선이 오히려 정돈되어 있다. 정명훈은 어느 곡 하나 서두르지 않고, 이야기 안에서 음악의 호흡을 조율한다. 그래서 이 음반은 단지 ‘좋은 연주’가 아니라, ‘잘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여전히 《로미오와 줄리엣》에 마음을 빼앗길까. 아마 이야기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놀라울 만큼 섬세하고 아름다운 감정들 때문일 것이다. 정명훈과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는 그 복합적인 감정을 일정 거리를 두고 조용히 들여다보듯 그려낸다. 이 음반을 듣고 있으면, 이 사랑 이야기가 오래전의 비극이 아니라, 지금 우리 곁에서 함께 겪는 일처럼 다가온다. 잊히지 않는 설렘, 피할 수 없는 죽음, 그리고 그 사이를 지나는 사랑의 순간들. 그런 감정의 진실이 음악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에, 이 음반을 자꾸 다시 찾게 된다. 다시 보고 싶은 이야기, 다시 들려오는 음악이다.


Essential Track | Ballet Suite No. 1 - Op. 64a:6 - Romeo And Juliet (Balcony Scene)

‘발코니 신(Balcony Scene)’은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담은 음악이다. 두 사람의 사랑이 처음으로 깊어지는 장면이다. 선율은 투명하게 흐르면서도 서늘한 예감처럼 아득하게 멀어진다. 두 사람의 결말을 아는 우리에게는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슬프게 느껴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https://youtu.be/6P2ABp-ggrM?si=K6CeuM_RhH6PNEyF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