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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지 Jul 27. 2020

아기와 음악

 큰맘 먹고 비싼 전집과 CD를 샀다. 결혼 전, 아니 아기를 낳기 전에는 전집을 사는 엄마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아기가 읽을 책이라면 서점에서 정성 들여 한 권, 한 권 고르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수십 권의 책을 한 번에 구입하는 것은 아기에 대한 노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었다. 허나 막상 내 아기를 낳고 키우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전집을 알아보고 구입하는 것 또한 아기를 키우는 엄마로서 엄청난 노력이었다. 우연히 아기들의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모 전집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안 그래도 처녀 적부터 팔랑거리다 출산 이후 더욱 얇아진 내 귀는 비바람에 요동치는 잎사귀처럼 홱 뒤집히고 말았다. 그렇게 수십만 원을 들여 책과 노래가 담긴 CD를 사들였다.


 남편의 반응은 그다지 탐탁지 않았다. 중고로 구입하면 큰돈을 절약할 수 있는데, 그 사실을 알고도 기어이 새 물건을 주문한 아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 또한 도박하는 심정이었다. 휴직 중이라 급여가 따박따박 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아기가 좋아할지 확신할 수 없는 비싼 것들을 덜컥 구입하다니. 비닐 포장을 뜯고 책의 첫 장을 펼치고, CD를 CD플레이어에 집어넣는 순간 몹시도 두근거렸다. 아기의 반응은 미묘했다. 일단 책에 대해서는 두말할 것이 없었다. 아기에게 책은 그저 커다랗고 얇은 치발기였다. 여기저기 물고 뜯고 잡수시고는 통장잔고를 생각하며 머릿속이 복잡해진 엄마의 표정이 재미있는지 씨익 웃었다. 하지만 노래는 그렇지 않았다.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는 음악을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매일같이 노래를 들려주었더니 어느새 그 중에도 좋아하는 음악이 생겨, 다른 곳에서 놀다가도 그 노래가 나오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쏜살같이 스피커로 기어가서 흔들흔들 박자를 타며 논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나도 음악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과 함께 살았다. 우리 집이 부유하여 악기를 여럿 배우거나 음악회에 자주 다닌 것은 아니었다. 엄마, 아빠, 언니,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식구가 함께 지내던 단칸방은 침실이자 놀이터였다. 엄마는 자주 동요를 틀어주셨다. 노래에 맞추어 몸을 흔들고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내가 조금 더 자라서는 팝송을 자주 들려주셨다. 팝송을 틀어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좋아하셨던 엄마는 인기곡들이 잔뜩 담긴 팝송 카세트테이프를 아끼셨다. 가난한 형편 탓에 배움의 기회를 길게 가져보지 못하셨던 엄마였지만, 영어 노랫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셨다.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 엄마와 함께 노래를 들으며 내 머릿속엔 노란 리본이 달린 나무가 아름다운 풍경처럼 그려지곤 했었다. 


 그렇게 노래와 음악은 내 친구가 되었다. 밤새 라디오를 듣다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뛸 듯이 기뻐하기도 하고,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홀로 걷던 하굣길이 외롭지 않았다. 실연의 아픔을 겪었을 때도, 시험에서 탈락했을 때도 짧은 노래 몇 곡이 날 달래주었다. 우리 아기가 앞으로 겪을 인생도 그러하겠지.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엉덩이를 들썩이는 해맑은 아이를 보며 생각한다. 음악이라는 건 지금처럼 행복의 순간에 함께할 친구이기도 하지만, 지치고 외로울 때 슬쩍 나에게 다가오는 위로이기도 하다고. 살면서 필연적으로 마주할 슬픔과 고통의 순간에 그의 다친 마음을 어루만져줄 무언가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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