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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하 Nov 20. 2023

4화 - 롤모델


 "수현아, 그런데 너 진짜 여기 어떻게 오게 됐냐?" 술자리가 무르익어 갈 때 친한 선배 한 명이 물어왔다. 실험실에 타대생은 거의 없었다. 몇 년 만에 타대를 졸업하고 들어온 내가 신기한 눈치였다.

 " 대학 때 친한 선배가 있었어요. 공부 잘하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졸업할 때쯤 되니깐 그 선배가 석사 서한대로 간다고 하더라고요.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어서 놀랐죠. 그런데 그다음 해 동기가 또 서한대 대학원으로 진학한다고 하더라고요. 와, 이게 되는구나 싶어 구미가 당겼죠. 그때 제가 공부 좀 잘했으니까, 한 번 해 보자 했던 거죠."

 " 오, 공부 잘했어? 그런데 지금 왜 그래? 풋"

 " 선배님 지금 막내 저 혼자라 연구실 잡일 제가 다 하잖아요." 술자리에서 한바탕 웃음소리가 난다.

 " 알았어, 인마 눈에 힘 풀어. 그 선배는 어느 연구실이야? 연구 재밌대?"

 " 처음 온 선배는 석사만 하고 졸업했어요. 그다음 온 동기는 아직 다니고요." 수현은 문득 생각에 잠긴다. " 학부 선배와 동기 그  두 사람이 없었으면 지금 나는 어디에 있을까' 소란스러운 술자리가 낯설게 고요해지는 느낌이다. 아마 둘이 없었으면 수현은 발을 들여놓지도 않았을 세계다, 지금 이 술지라리는, 이 연구실은, 이 학교는, 이 세계는.

  

 대학교 3학년, 수현은 취업과 대학원 중에 결정을 못 하고 있었다. 돈만 생각 안 할 수 있다면 남들처럼 휴학하고 해외 연수라는 것도 가 보고 싶었다. 팔자 좋은 소리다, 해외 연수는! 그럴 돈이 주변에 있기나 했던가. 취업 안 하고 대학원 간다는 것조차 집에 말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 자조적인 한숨의 나날들이었다. 그러던 중 동기서한대 대학원을 진학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애가 그렇게 공부를 잘했었나? 가만, 그전에도 선배 한 명 갔었는데..' 귀로 흘려버린 이야기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잘 풀린 남의 이야기로만 생각하고 자신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꼈었는데 머리에서 계속 맴도는 것을 보니 구미가 당긴 눈치다. '나도 할 수 있겠는데?' 때마침 학점이 굉장히 잘 나온 직후였다. 장학금 액수도 이전 학기보다 커졌다. 어릴 적 장래희망 칸에 적었던 연구원의 모습이 떠오른다.

 4학년 봄 적극적으로 대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2학기 전에는 취업과 대학원 중 진로의 방향을 설정해야 하니 1학기 때 먼저 서한대 대학원 과정을 알아봤다. 수현은 매사에 적극적이라 알아보는 것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하지만 알아볼수록 조심스럽고 신중해졌다. 대학까지는 파도에 휩쓸리는 물결처럼 저절로 온 것 같았는데, 이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한다고 하니 내 인생에 있어 처음으로 칼자루를 쥐고 있는 느낌이었다. 마치 지금의 선택이 앞으로의 남은 인생 전부를 결정하는 순간 같았다. 20대의 누구나 그러듯 수현 역시 그것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다. 실패 따위는 용납할 수 없다는 마음가짐이었다. 인생이 그리 쉬운 직선 도로면 세상 어려울 것이 없겠다.

 비범한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 서한대라고 생각했던 수현은 자기 같은 일반 학생들도 그곳에 갈 수 있는지, 적응을 할 수 있을지, 무슨 연구를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당시 목표한 대학원 과에는 많은 교수님이 계셨고 각 연구실마다 연구 방향, 분위기가 달랐기에 그것을 알아보는 게 관건이었다. 아는 사람이 전혀 없고 연구 방향과 진척사항 등 아는 바도 전혀 없으니 맨 땅에 헤딩하기였다. 그래도 수현은 기뻤다. 평생 들어가 볼 일도 없을 줄 알았던 서한대 홈페이지를 외울 정도로 들락날락 거리며, 전화번호를 누르고 이메일을 쓰는 과정들이 뭐라도 된 것처럼 믿기지 않고 마냥 기쁘기만 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본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다. 아쉬울 때는 찾게 된다고 평소 강의실에서 인사만 하던 교수님들께도 찾아가 상담을 하고, 정보를 얻으며 다녔다.

 많은 연구실 중 관심 있는 연구 주제를 3개 정도로 줄일 수 있었고, 그중 사람들 관계가 좋고 흥미 있는 연구 방향의 실험실을 골라 교수님께 연락을 드렸다.

 "엄마, 나 오늘 서한대 교수님 면접 본다고 했잖아. 지금 끝났는데 잘 보고 나온 것 같아. 연구실도 구경했어. 사람들도 밝고 분위기 좋더라고. 너무 좋다, 엄마." 면접을 끝내고 나오는 길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아이고, 수현아 안 떨고 잘했어? 잘했다, 진짜. 엄마는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데 우리 수현이 혼자 너무 잘하네, 고맙다."


 믿기지 않는 현실을 보고 오니 수현은 가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후 입학 자격 조건과 시험등을 통과해서, 지금 이 술자리에 수현이 있다. 시끌벅적 하하 호호 소리가 정겹게 느껴진다. 수현은 안다. 이 모든 것먼저 발도장 찍은 사람들의 발자취 덕분이라는 것을. 다른 대학으로 점프하여 대학원을 입학할 수 있는지 가능 여부도 모르던 시절, 낯선 길 위의 발자국은 분명 하나의 이정표로 다가왔다. 그 길로 먼저 지나간 사람들의 발자취가 있었기에 수현 또한 들어설 수 있었다. 왜 살면서 롤모델이 중요하다고 하는지 알겠다. 거창한 롤모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자국 정도의 롤모델만으로도 충분함을 수현은 느낀다. 멈추지 않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딛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주변에 보고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이 중요한 이유다.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삶의 방향을 내다보면서 나도 모르게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지금 이 술자리에서의 사람들 역시 수현 자신을 또 한 발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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