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여행처럼 #속초 낯설게 보기
여우비. 누가 처음 생각해 낸 말인지는 몰라도 참 예쁜 말인 것 같다.
일기예보에서 오후에 1~2시경에 비가 온다고 적혀 있었을 때도 사실 반신반의하면서 고민하다가 접는 우산을 챙겨 들고나갔다. 지금까지 쌓아 온 빅데이터로 미루어 볼 때 은근슬쩍 맑음으로 바뀌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정도로 기상청에 대한 신뢰가 낮은 편이기도 했고, 비가 올 거라고 하기에는 햇빛도 쨍쨍하고 날이 너무 맑았다.
그런데 정말 오후 1시가 되니 거짓말처럼 날은 맑은데 하늘에서 빗방울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쓸 정도까지는 아니고 몇 방울씩 간헐적으로 떨어지던 물방울이 강한 바람에 꽃잎처럼 흩날리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비현실적이었다.
좀처럼 집 밖에 나갈 일 없는 내가 이런 날씨를 우연히 맞닥뜨리게 되다니.
그야말로 선물 같은 순간이었다.
사실 오늘 여우비가 내릴 때 길가에 서 있었던 이유는 당근 거래를 위해서였다.
판매자와 도통 시간이 맞지 않아서 채팅을 보내고 일주일이 훨씬 지나서야 거래 날짜가 잡혔다. 게다가 본인은 사정상 못 나오기 때문에 가족을 내보낸다고 하면서도 당일 오전까지도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지 않으려고 해서 당황스러웠는데, 결과적으로는 우리 동네 근처로 와준다고 하니 나야 땡큐였다.
2시로 약속 시간을 정하고 도서관에 들렀다가 가면 딱 시간이 맞을 것 같아서 나름의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제가 일이 좀 있어서 지금 아니면 시간을 늦춰야 될 것 같은데요."
이게 소위 말로만 듣던 코리안타임이란 건가. 주변에 약속 시간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사실 약속 시간 제일 못 지키는 게 나라서...) 당혹감을 감추면서 현재 어느 가게 앞에 있다고 이야기하니 10분 내로 이쪽으로 오겠다고 하고는 전화가 끊겼다. 더 생각해 봐야 의미가 없을 것 같아 5분, 10분, 15분가량이 지나고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
"OOO이에요?"
대뜸 가게 이름을 꺼내기에 처음에는 그저 길을 묻는 행인인 줄 알고 친절하게 "네, 이 가게 맞아요."라고 말했는데 알고 보니 아까 통화했던 판매자를 대신해서 나온 어머니였다. 자동차로 올 거라 생각했던 내 예상과 다르게 안장에 바구니를 실은 기동성 좋아 보이는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어휴, 내가 이 동네는 잘 몰라서. 공부 열심히 하세요!"
책을 많이 사서 그런지 낯선 아주머니는 공부 열심히 하라는 응원의 말까지 던지고는 자전거를 능숙하게 타고 떠나갔다. 신체 건강한 젊은 사람이 어른을 모르는 곳까지 오게 만들었다는 유교걸의 양심이 아팠지만, 어쨌든 고마운 건 고마운 거였다.
여우비 맞으면서 낯선 동네까지 와주신 것에 대한 답은 당근 거래 후기 ‘최고예요’로 보답한 셈 치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