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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늬밤 Oct 17. 2020

그대는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반 고흐, 상처 받은 영혼을 만져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누군가의 초상화를 그리는 마음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생일선물은 얼굴도 모르는 낯선 이가 끓여준 미역국입니다.


Adi Goldstein, Unsplash

사실 생일을 그렇게 챙기는 편은 아닙니다. 참으로 애매한 날짜에 태어난지라 어려서는 줄곧 추석 연휴에 생일이 끼여 있어서, 커서는 스스로 제 생일이라 말하기 부끄러워서 스리슬쩍 넘어가기 일쑤였죠. 다행히 이를 섭섭해하는 성격은 못 되는 데다가 눈 앞의 바쁜 일상을 쳐내기 급급했기에 '어, 다음 주 생일이네? 어어.. 생일이 지나버렸네?' 하며 넘겨버리곤 했고요.


22살 그 해의 생일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전날 잔뜩 밀린 과제를 하느라 늦게 잠든 탓에 살짝 늦잠을 잤는데 하필 그날은 1교시부터 수업이 있는 날이었지요. 물론 강의실 건물 바로 앞의 기숙사에 살았었기에 사실 눈꼽만 떼고 톡- 튀어나가면 그만이었으나, 그래도 생일날인데 머리는 감자 싶어 급하게 씻고 머리를 말리던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나 지금 긱사 앞인데. 잠깐 나와!"


생-레미-드-프로방스의 생-폴 병원, 1889

좀 있다가 수업 때 만날 텐데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갑작스러운 친구의 방문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지각할까봐 조급하기도 했던 저는 젖은 머리를 대충 털고 기숙사 앞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느닷없이 등장한 그 품에 안고 있던 도시락 통을 대뜸 내밀었습니다.


"강의실에서 줄까 하다가 그래도 아침에 생일상 먹고 오면 좋을 것 같아서. 식을까봐 엄청 급하게 왔다. 생일 축하해!"


자그마치 3단 도시락이었습니다. 집밥 같은 반찬 몇 가지, 흰 쌀밥, 그리고 아직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미역국.. 지난밤 미역국 끓여달라고 엄마를 닦달해서 준비했더랬죠. 직접 요리한 거였으면 눈물 펑펑 쏟았을 텐데- 짐짓 시크한 척 장난을 쳐보았지만 이미 마음은 감동의 쓰나미였습니다. 타지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이(..자그마치 친구 어머니!)가 정성스레 끓인 미역국을 먹으며 생일날 하루를 시작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요.


어떤 반찬이 들어있었는지, 그 미역국의 맛이 어떠했는지는 사실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해사하게 웃으며 도시락통을 건네던 정다운 실루엣과 '이런 친구를 곁에 둔 나는 참 행운아인 것 같다'하고 생각했던 그 순간만이 아스라이 마음에 남아있을 뿐입니다.


작가의 초상, 1888

졸업 후 그 친구는 타지에 살며 그곳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기차 타고 버스 타며 먼 길을 돌고 돌아 도착한 친구의 생애 첫 자취방에서 저는 직접 그린 그의 초상화를 집들이 선물이랍시고 꺼내 들었습니다. 나름 팝아트 느낌을 살려서 그려보았지만 누군가의 초상화를 진지하게 그려본 건 처음인 데다, 그림 보는 건 좋아해도 실력은 엉성한 저였기에 실로 허접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친구는 환하게 웃으며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어요. 자신의 분신이라며 이름을 붙여주기까지 했고요.


그 모습을 간질간질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어쩌면 반 고흐가 막역한 벗들의 초상을 그렸을 때,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하고 가만히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좌) 별이 빛나는 밤, 1889  /  (우) 반 고흐의 자화상, 1889

서른일곱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고독과 외로움 가운데서 그림을 그리며 자신 안에 있는 강렬한 감정들을 쏟아부었던 화가, 살아생전 작품을 단 1점밖에 팔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고 무명했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특히 <해바라기>, <별이 빛나는 밤> 등 그의 대표작들이 그려진 때는 그가 죽기 전 마지막 10년인데, 이 시기는 영혼의 단짝이라 믿었던 화가 폴 고갱과의 다툼과 이별,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발작과 정신적 고통, 물감 살 돈이 없어서 동생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해야 했던 서글픈 가난으로 점철된 기간이었습니다. 게다가 타고난 괴팍하고 과격한 성미는 많은 이들이 그의 곁을 떠나가게 만들었고, 때문에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외로운 늑대처럼 살았지요.


당연히, 고흐가 그러한 삶을 스스로 원했던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저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에 서툴렀을 뿐. 그런 고흐 곁을 끝까지 지켰던 이는 그의 동생 테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테오 외에도 고흐와 절절한 우정을 나누었던 이들은 있었습니다.


고흐가 고마움과 사랑과 진심을 담아 초상화를 그려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미처 잘 알지 못했던 반 고흐의 숨겨진 소울메이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반 고흐의 우편배달부,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아를의 밤의 카페, 1888  /  아마도 이 곳에서 고흐와 룰랭은 밤을 지새우며 대화의 꽃을 피우지 않았을까

파리를 뒤로하고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밝고 명랑한 남부로 향했던 고흐는 아를에 정착하여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막 펼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소 외골수적인 기질이 있던 그가 완전히 낯선 땅에서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을 겁니다. 붉은 머리와 섬세한 영혼을 가졌던 네덜란드인 화가는 꽤 많이 외로웠겠지요.


그러던 중 고흐는 자주 찾던 선술집에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파란 제복의 사나이와 곧 가까워집니다. 그의 이름은 조셉 룰랭(Joseph Roulin, 1841-1903). 고흐가 그림으로도 여러 번 그려내며 애정을 드러냈던 아를의 우편배달부입니다.


우체부 조셉 룰랭의 초상, 1888

알코올 중독자가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셨 그 사나이는 고흐보다 고작 10살가량 많을 뿐이었지만, 애주가인 탓에 실제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였습니다.


고흐는 그런 그의 모습이 마치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외로 철학적인 면이 있었던지 룰랭과 대화하면 그에게서 소크라테스가 엿보인다고 동생과의 편지에 적기도 했지요.(아.. 테스 형!)


우체부 조셉 룰랭의 초상, 1888/ 1889

고흐는 친애하는 벗 룰랭의 푸근하고 넉넉한 인상을 그림으로 잘 담아냈습니다. 늘 술에 취해 있던 탓에 살짝 풀린 눈과 불그스름하게 달아 오른 코와 두 뺨, 그와 대비되는 푸른빛의 우체부 정복, 포즈 잡는 것이 어색했는지 딱딱하게 굳어버린 표정과 포즈, 곱슬곱슬 잘 말려있는 양갈래의 수염과 그 안에 감추어진 둥그스름하고 통통한 얼굴.. 왠지 모르게 정겨운 모습에, 저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한겨울 크리스마스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떠오릅니다. 시린 코를 감싸 쥐며 눈길을 헤치고 와 선물을 한 아름 안겨다 주는 그 모습 말입니다.


여기에 고흐는 하양, 파랑, 빨강의 형형색색 꽃들을 배경에 그려 넣어 룰랭을 향한 자신의 애정을 극진히 표현했습니다. 사람의 성격이나 심적 상태를 배경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는 고흐의 다른 그림에서도 종종 엿볼 수 있지요? 이만큼이나 화려한 꽃무늬 배경은 일본 우끼요에 판화의 영향을 받은 탓도 있지만 그만큼 룰랭을 아끼는 마음을 담으려는 의도로 보여집니다.


(좌) 룰랭 부인의 초상, 1889  /  (중) 아르망 룰랭의 초상, 1888  /  (우) 까미유 룰랭의 초상, 1888

그런 고흐를 룰랭 또한 굉장히 아꼈습니다. 낯선 이방인인 고흐에게 룰랭은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말벗이 되어주었고 집에 초대해 따스한 식사를 여러 번 대접하기도 했지요. 또 고흐의 그림에 종종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는데, 고흐는 룰랭의 초상화만 6점을 그린 바 있고 룰랭 부인을 비롯해 룰랭의 자녀들의 초상화도 다수 그렸습니다.


그렇게 안정을 찾아가던 고흐의 아를 생활은 고갱과의 다툼으로 인해 파국을 맞고 맙니다. 말다툼 후 고흐가 우발적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리자 마을 사람들은 그가 미치광이라며 모두 외면해버립니다. 오직 룰랭만이,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키며 자주 찾아와 살갑게 챙기고 보살펴주죠.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들 중 일부. 그의 초기작 <감자 먹는 사람들>의 스케치도 보인다.

룰랭은 요즘 표현으로 치면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었나 봅니다.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고흐는 그를  '그는 모진 편이 아니고 우울하지도 철저하지도 않아. 또한 항상 완벽할 정도로 정직하지도 않지. 그러나 매우 현명하고 따뜻하며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란다'라고 묘사했습니다.


또 ‘그는 나를 대할 때 마치 늙은 병사가 차분하고 다정하게 젊은 병사를 대하듯이 하는구나’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만큼 철두철미한 것과는 거리가 먼, 다소 허당끼 있고 인정 많은 아저씨가 떠오르지 않나요? 옆에 있으면 은근히 든든하고 의지가 될 듯한 그런 사람 말입니다.





고흐 생전에 팔린 단 한 점의 그림 속 인연



빌레로이 앤 보흐의 다양한 디자인 시리즈 (좌) 디자인 나이프  /  (우) 아우든

한편 고흐의 또 다른 소울메이트는 약간 뚱맞지만 독일의 유명 그릇 브랜드 '빌레로이 앤 보흐'와 관련이 깊습니다. 그리고 '고흐 생전에 팔렸던 유일한 그림'에 대해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고흐와 예술에 대해 교류하며 그의 작품세계를 후원해주었던 또 다른 인생친구, 바로 외젠 보흐(Eugène Boch, 1855-1941)가 그 주인공입니다.


다양한 예술가들을 후원했던 보흐 남매  (좌) 안나 보흐  /  (우) 외젠 보흐

도자기 회사로 명망 높은 보흐 가문(후에 빌레로이 가문과 합병하여 지금 우리가 아는 '빌레로이 앤 보흐'가 되지요)의 5대손으로 태어난 안나 보흐와 외젠 보흐는 예술가적 기질이 다분한 남매였습니다. 둘 다 상당한 수준의 그림 실력을 뽐냈던 화가였기도 하고, 외젠 보흐는 시인으로도 활동한 바 있을 정도니까요.


보흐 가문은 대대로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후원하는 일에 힘 써왔는데 이들 남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넉넉한 재력, 숨겨진 원석을 발견하는 뛰어난 안목을 가진 외젠 보흐는 가난하지만 재능 있는 여러 화가들을 지원해주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1888년 6월, 마침내 외젠과 고흐의 위대한 만남이 성사됩니다.


이들은 단번에 서로의 예술성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아마 전기가 찌릿- 통하는 느낌이 아니었을까요? 서로 마음을 나누며 고흐와 외젠은 예술과 삶을 터놓고 얘기하는 막역한 사이가 됩니다. 그 당시만 해도 거의 무명 화가에 가까웠던 고흐를 외젠은 크게 인정해주며 그의 누이 안나에게도 소개하였고, 더 나아가 고흐의 작품을 구입하자고 그녀를 설득하기까지 하지요.


그 그림이 바로 <붉은 포도밭>. 고흐의 살아생전 팔린 유일한, 단 한 점의 그림으로 유명한 이 작품입니다.


반 고흐, 붉은 포도밭, 1888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던, 광인이라며 피하고 외면했던 이방인, 아침에 일어나 잠들기 전까지 온통 그림 그릴 생각뿐이지만 물감 살 돈이 없어서 늘 동생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던 빈자, 살아있는 동안 오직 단 1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한 비운의 화가.. 자신을 둘러싼 불명예스러운 별명과 비웃음으로 고통받던 고흐에게 외젠은 생명의 은인과 같은 존재로 다가오지 않았을까요.


그 당시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고흐는 친구 외젠에 대한 고마움, 신뢰를 숨기지 않고 드러냅니다.


난 나의 예술가 친구, 큰 꿈을 꾸는 사나이, 나이팅게일이 노래하듯 일하는 그를 그리고 싶어. 난 이 그림을 통해 그를 향한 나의 고마움과 애정을 전할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충실하게, 가장 그의 모습 그대로 그리고 싶구나.



시인(외젠 보흐의 초상), 1888 (1855-1941)

과연 그의 말대로, 그는 자신을 알아봐 준 영혼의 벗을 최선을 다해, 충실하게, 그리고 그가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그려냈습니다. 고흐는 자신의 팔레트에서 가장 풍부하고 강렬한 파랑으로 배경을 칠하고 샛노랗게 반짝이는 별들을 콕콕 찍어 넣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의 초상화 버전 같다고나 할까요? 고흐의 깊은 내면을 밝혀준 친구에 대한 고마움이 담겨서인지 몰라도, 외젠 보흐는 그림 안에서 캄캄한 어둠을 밝히는 환한 별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고흐는 <시인>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어딜 가나 이 그림을 들고 다녔습니다. 한동안 그의 방 한 켠에 걸어두기도 했는데 이는 그의 그림 <반 고흐의 방>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침대 위에 걸린 두 개의 나무액자 중 첫 번째가 바로 <시인(또는 외젠 보흐의 초상)>이지요.


반 고흐의 방, 1888  /  고흐는 자신의 방을 주제로 여러 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 작품은 그중 초기 버전이다.

잠 못 들고 뒤척이는 어느 밤, 자신의 머리맡을 지켜주는 친구의 따뜻한 눈빛을 받으며 고흐는 행복한 꿈결로 떠날 수 있었을까요. 고흐가 죽고 난 뒤 유언에 따라 이 그림을 전달받은 외젠 보흐 역시 죽기 직전까지 이 그림을 곁에 두며 바라보고 있었다고 하니, 죽음도 이들의 우정을 막을 수는 없었나 봅니다.


요란하지도 떠들썩하지도 않게, 묵묵히 응원하고 지지해주며 서로에게 진정한 인생 친구가 되어주었던 고흐와 조셉 룰랭 그리고 외젠 보흐. 웬만한 연인들 간의 러브 스토리보다도 더 진하고 찡한 이들의 우정은 고흐의 작품과 더불어 깊고 긴 여운을 주는 듯합니다.





그대는 그런 사람을 가졌나요


폴 고갱의 의자 (빈 의자)

흔들리는 촛불처럼 뜨겁게 타오르다 떠난 고흐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괜스레 속상하고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세상은 왜 유독 그에게 팍팍하고 삭막했던 건지. 위대한 화가 이전에 그저 고독하고 외로웠던, 가엾은 이 사내에게 조금만 더 상냥할 수는 없었던 건지.. 물론 지금은 그림으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영감을 주며 사랑받는 화가가 되었지만, 그의 생전에는 결코 이러한 기쁨을 누리지도 사람들에게 인정받지도 못했으니까요.


때문에 그림만이 자신의 유일한 구원이라 믿었던 고흐. 그래도 그의 곁엔 그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고 받아 주었던 조셉 룰랭외젠 보흐,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믿어주는 친구들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캔버스에 그려가며 고흐는 그동안 맛보지 못했던 따스함, 정, 우정이라는 감정들을 느껴보지 않았을까요. 그 역시 처럼 '이런 친구들을 내가 만나다니! 난 정말 행운아 인가 봐-' 하고 중얼거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인생에서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존중하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그래서 힘들지만, 중요하고 가슴 벅찬 일입니다. 그 사람을 가졌느냐고 묻는 어느 시인의 언어처럼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런 사람을 가졌을 때 삶은 꽤나 살아갈만해집니다.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함석헌 <그 사람을 가졌는가> 中 일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저 고대 그리스의 어느 철학자는 말했건만, 가끔씩은 '내가 정말 사회적 동물이 맞기는 한 건가' 싶은 순간들이 있습니다. '사회'라는 인간관계 안에서 웃을 일도 많지만, 때론 사람에게 상처 받고 또 때론 같이 있는데도 그저 외로워지죠. 내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주는 사람이 이 세상엔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분명 존재하구요.


그럴 때면 사회성 부족한 사회적 동물로 태어나 네가 참 고생이 많다며 스스로 다독여줍니다.


낮잠(밀레 작품 모사), 1889-1890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하라는 말이 있지요. 사람에게 치여 마음이 어두울 때면 무작정 밤거리를 걸으며 '그 사람을 가졌는가, 그런 인생의 단 한 사람을 너는 진정 가졌는가' 스스로 되뇌입니다. 내 편이 되어주는 얼굴들을 밤하늘에 하나씩 동동 띄워 나가다 보면 그 작은 반짝거림이 모여 마음 안에 크고 환한 보름달을 수 놓습니다.


사회적 동물로 태어나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결코 많은 것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닙니다. 저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고, 내 마음이 곧 저의 마음으로 통하는 그런 사람 몇 명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내 곁을 지켜주었던 누군가가 그러했듯이, 나 또한 내 인생의 귀인들에게 빨간 코와 푸른 제복의 조셉 룰랭처럼 푸근한 벗이 되어주기를. 별이 빛나는 밤을 닮은 시인 친구와 같은 신실한 벗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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