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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늬밤 Oct 24. 2020

어른에게도 분리불안은 있습니다

 브리튼 리비에르 <공감>, 단단하고 명랑한 홀로가 되는 법

그날 그 녀석이 남기고 간 건


흔쾌히 돌봐주기로 한 지인의 반려견은 1살이 채 되지 않은 아기 강아지였습니다.


Mo Jo, Unsplash

본가에 있는 4살 배기 시바견 동생과도 잘 지내는지라 아직 애기 냄새 폴폴 풍기는 쪼꼬미 정도는 일도 아니라며, 출장 잘 다녀오시라고 큰 소리를 뻥뻥 쳤지요. 곱슬곱슬하고 폭신폭신한 털에 곰인형 같이 귀염뽀짝한 외모와 애교스러운 성격. 만나자마자 첫눈에 반해버렸고 모든 게 수월하게 흘러갈 것만 같았더랬죠. 그리고.. 전 1박 2일 동안 이 뽀시래기 옆에 하루 종일 붙어있어야만 했습니다. 요 녀석, 글쎄 잠시도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껌딱지였지 뭐예요.


그 모습이 약간 안쓰럽다가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습니다. 무릎 위에서 졸린 눈을 뻑이며 쌔근쌔근 숨 쉬는 이 작은 녀석의 온기가 온 집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듯했고요. 잘 때는 제 집을 놔두고 당연하다는 듯 옆에 바짝 붙어 자리를 잡았는데,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새벽에 깨지 않고 푹 잠들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녀석이 돌아가고 난 뒤 발생했습니다.


브리튼 리비에르, Cupboard Love, 1881

고작 하룻밤 함께 했을 뿐인데 그 빈자리가 이렇게나 크게 느껴질 줄이야. 설거지를 하다가도 저를 찾던 그 눈동자가 생각 나 스을-쩍 뒤돌아보고, 바쁘게 꼬리 흔들며 반겨줄 모습을 괜스레 기대하며 아침에 눈을 떠보았지만 이 공간엔 나 혼자라는 걸 확인하게 될 뿐이었습니다. 갑자기 온 집이 싸늘하고 지나치게 조용하게 느껴졌지요. 


급하게 친구들에게 연락해 수다를 떨어 보고 약속을 잡아 이 외로움을 토로해보았습니다. 강아지 영상을 주구장창 찾아보며 마음을 달래다가 자주 후원하는 유기견 보호센터에서 한 마리 데려오면 어떨까 하는 무모한 생각까지 품어 보았죠. 네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어하는 마당에 무슨 반려견이냐! 하는 주변의 애정 어린(?) 타박과, 그래도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지 하는 내적 자아의 극구 말림에 애써 의지를 꺾어야 했지만 말입니다. 


알 수 없는 허전함에 결국 그날은 쉽게 잠들지 못했습니다. 이 공허함은, 어떻게 채워질 수 있는 걸까요.





공감, 눈으로 주고받는 서로의 온기


아마도 제가 겪었던 그 공허함은 정서적 교감의 갑작스런 부재에서 기인한 것일 겁니다. 그 강아지가 전해주었던 짧지만 강렬한 애착, 공감, 감정.. 거기서 알게 모르게 심리적 안정감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반려동물과 사람 사이에서 맺어지는 그러한 유대감을 따뜻하고 몽글몽글하게 그려낸 화가가 있습니다. 영국의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화가 브리튼 리비에르(Briton Rivière, 1840-1920). 사람과 동물의 친밀한 관계를 담은 그의 그림 연작은 동물 애호가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데요. 그중에서도 당대의 평론가들에게 '최고의 그림'이라 찬사를 받은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공감>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그림입니다.

 

브리튼 리비에르, 공감(Sympathy), 1878

뾰로통한 표정의 소녀가 턱을 괸 채 계단에 걸터앉아 있군요. 푸른빛의 눈동자 색을 꼭 닮은 푸른색 드레스가 멋들어지건만 무엇에 그리 심통이 난 걸까요. 새 옷을 입고 진흙탕에서 뒹굴었다며 혼이 난 건지, 강아지와 놀다가 접시라도 깨트려서 시무룩한 건지.. 좀처럼 소녀의 기분은 나아질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소녀의 곁에서 그녀를 위로하기라도 하듯 어깨에 가만히 얼굴을 대고 있는 흰 개를 한번 보세요. 소녀의 덩치만큼이나 큰 몸을 바짝 기댄 채 초조한 듯한 눈망울로 그녀의 표정을 살피기 바쁜데요. 그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괜찮아. 네 곁엔 언제나처럼 내가 있잖아'


(좌) 오랜 소꿉친구(Old Playfellows), 1883  /  (우) 브리튼 리비에르(Briton Rivière, 1840-1920)

브리튼 리비에르는 옥스포드대에서 미술 교수로 재직하던 아버지를 둔, 정통적인 미술교육을 잘 받은 화가였습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본인도 옥스퍼드에서 미술을 공부하며 다수의 아카데미에서 꽤 인정을 받기도 했지요. 그가 살던 빅토리아 시대에는 역사, 종교, 문학을 소재로 한 그림이 유행했는데, 화가라면 누구라도 당연히 그릴 법한 이 그림들은 그의 흥미를 오래 끌지 못했습니다. 25세가 되던 해에 리비에르는 동물들을 주제로 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는데요. 다소 비주류일법한 이 그림들은 예상외로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게 됩니다.


사실 대부분의 화가들이 그림 속에서 동물을 다루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각 동물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개-충성, 원숭이나 고양이-정욕 등)을 활용해 그림의 주제를 부각하는 경우, 또 하나는 그저 화면 구성을 위해 장식적 용도로 배치하는 경우. 그러나 리비에르는 달랐습니다. 그가 그려내고자 한 것은 단순히 사람의 옆에 동물이 배치된 평범한 그림이 아닌, 말이 통하지 않아도 이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무언의 교감 그리고 감정적 교류 그 자체였습니다.


(좌) 놀이 친구(Play Fellows), 1900  /  (우)  애인에게 차인 (Jilted), 1887

애인의 이별 편지에 분노와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남자의 손을 달래주듯 맞잡고 있는 저 개를 볼까요. 귀가 바짝 선 요 귀여운 강아지는 말을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야? 괜찮아? 걔가 또 헤어지재?!'라고 수 백번은 외쳤을 모양새 입니다. 이처럼 그림 속 반려견들은 우울한 주인 곁을 든든히 지키며 그윽한 눈빛으로 위로하기도 하고, 마치 소꿉친구처럼 사람과 뛰어놀며 장난을 치곤 합니다.


긍정적인 감정들뿐만 아니라 외로움, 상실, 고통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까지 다 헤아려줄 듯한 이들을 바라보다 보면 절로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지어지는데요. 오직 진실된 마음만 있다면, 서로를 향해 뛰는 심장만 있다면, 말이 통하지 않아도 꼭 사람이 아니더라도 진정한 유대관계는 가능한 것임을 우리는 그림 속 그들을 보며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그림은 '함께 한다는 것'이 주는 정서적 충족, 포근한 안락감.. 이러한 것들이 우리 삶에 실로 크고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새삼 실감하게 합니다.





'함께라서 행복해'의 함정


브리튼 리비에르, His Only Friend, 1871

'함께'라는 이러한 심리적 안정이 깨어질 때 우리는 쉽게 불안에 빠집니다. 


그중에서도 '분리불안'이란, 애착을 갖는 대상과 떨어져 있게 되면 극도의 불안을 느끼는 심리적 증상을 말합니다. 유아의 경우 부모가, 반려견의 경우 주인이 항상 자신과 함께 있어주길 원하며 그 애착의 대상과 잠시라도 분리되면 그가 마치 영영 떠나갈 것 같은 두려움을 경험한다고 하지요.


특이한 것은, 최근 들어 이러한 분리불안을 호소하는 '성인'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증상은 자기 자신을 비롯해 주변 사람에게까지 고통을 주기에, 현대인들이 소통하고 서로 관계 맺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이 분리불안이라는 것은 왜,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브리튼 리비에르, Compulsory Education, 1887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분리의 분기점을 맞이합니다. 모태에서 분리되어 바깥세상으로 나오는 순간, 부모의 품 속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유치원이나 학교에 나아가는 순간, 부모와의 관계보다 또래 사이의 관계가 더 중요해지는 순간, 그리고 마침내 비로소 물리적·경제적으로 독립하여 사회의 일원이 되는 순간까지.. 삶에는 이렇듯 수많은 분리의 순간들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각 분기점을 잘 극복해나갈 때 비로소 건강하고 안정적인 어른이 되는 것이고요.


그중에서도 '정서적 분리'가 잘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몸이었던, 한 몸 같았던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스스로 어떤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겪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Conscience makes cowards of us all', Study for 'Conscience'

이러한 과정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면 자꾸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려고 하게 됩니다. 혼자서는 자신의 가치를 확신할 수 없기에 그 심리적 불안과 공허함을 해소하고자 늘 누군가가 옆에 있어주길 원하지요.


그러나 삶이란 건 크고 작은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입니다. 함께 있을 때도 있고 혼자 견뎌야 하는 때도 있는 법이랄까요. 때문에 아무리 타인에게서 행복의 근원을 찾으려고 해도 결국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타인에 주는 기쁨, 안정감, 소속감과 같은 것들은 결국 한정적이고 유동적이기 때문이지요.


나와 상대방의 상황,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있다가도 없어지고 변할 수도 있는, 한계가 분명한 만족에 의존하고서 살아갈 수만은 없으니까요.





단단하고 명랑한 홀로가 되는 법


어른에게도 분리불안은 있습니다. 다 자란 척하는 우리 어른들도 끊임없이 부모, 애인, 친구 등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며 그 안에 숨어있는 결핍을 세련되게 포장해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만 해도 문득 혼자라서 외로운 날이면 여전히 특정 타인이나 물건, 존재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야금야금 피어오는 걸 느낍니다.


이를 극복하고 넘어서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바로 서는 것'이 필요합니다.


브리튼 리비에르, 째깍째깍(Tick-Tick), 1881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의 시간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운동이나 여러 취미, 요리, 명상 등 혼자서도 그 시간을 풍성하게 채울 수 있는 방법들은 충분히 많지요. 그렇게 혼자 있는 시간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먼저일 겁니다. 언제까지고 누군가 와주길 기다리며 시계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스스로, 혼자서도 즐겁고 행복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합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분리'에 새로운 마인드를 가져보는 것입니다. 불현듯 '혼자라서' 외롭고, '혼자라서' 심심해, 하고 자꾸만 생각의 물꼬가 틀어질 때면 저는 우리집 강아지 하루를 떠올립니다.


혼자서도 잘 놀고, 잘 쉬고, 잘 자는 명랑소녀 하루

하루의 경우는 시바견 특성상 꽤 많이 독립적인 성격의 분리'행복'견(犬)입니다. 사람을 좋아하지만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이 지켜져야 하고, 함께 있고 싶어 하면서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걸 선호하는 자유로운 영혼이랄까요.


물론 하루도 처음부터 분리행복견은 아니었습니다. 모견과 너무 이른 시기에 떨어지게 된 대부분의 강아지들이 그렇듯, 하루 또한 혼자 남겨지면 하울링, 식분증 등의 증상들을 보였죠. 가족들의 오랜 기다림과 훈련, 사랑 덕분에 지금의 의젓하고 늠름한 모습으로 변화한 것이고요. 그 과정에서 하루는 몇 가지를 배운 것 같았습니다. '눈 앞에 없다고 가족들이 영영 사라지는 것은 아니구나. 지금은 내가 혼자 있어야 하는 때이지만,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가족들이랑 놀 수 있어!' 하는 것과 '장난감 가지고 놀고 낮잠도 자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가네. 혼자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자유롭게 쉴 수 있어서 좋거든!'이라는 것. 이를 사람에게 대입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지금 당장 내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분명 나를 사랑하는 이들은 존재한다.

2. 삶이란 함께일 때도 혼자일 때도 있다. 지금은 혼자이지만 곧 다시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도 온다.

3.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겁고 행복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이를 위한 행복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동물이긴 하지만 그런 하루의 모습을 저는 참 많이 닮고 싶었습니다. 혼자일 땐 자유롭고 함께일 땐 신나는 그런 건강하고 세상 쿨한 사고방식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러한 시선과 태도로 나의 마음을 바꾸어보면 어떨까. 그런 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마침내 '분리됨의 행복, 분리됨의 자유'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브리튼 리비에르, 신뢰(Fidelity), 1869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관계들과 다양한 사람들끼리의 연결 가운데서 자유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저는 아직도 자신과 타자 사이에서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 건지 막막하고 헷갈려하며 오늘도 갈팡질팡 살아갑니다. 타인과의 관계를 결코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단단하고 명랑한 홀로의 삶 포기하진 말아야겠다 다짐해봅니다. 


우리 자신이 혼자만의 행복을 잘 유지할 때 타인과도 더불어 즐겁게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 믿음의 끝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더 공감해주고 감싸 안아 줄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마주하게 되길 기대해봅니다.



글. 아트소믈리에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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