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전화를 종종 놓칠 때가 있다. 일 하느라 바빠서 놓칠 때가 다반사고, 퇴근 후 푹 퍼지듯 쓰러져서 깜빡하기도 한다. 그런 딸이 밥은 제대로 챙겨 먹는 건지 못 미더울 때면 이번처럼 부모님께서 직접 행차하시기도 한다. 일 하랴, 글 쓰랴 전화조차 제대로 못 받는 바쁜 딸내미 얼굴 좀 보려고 오신 걸 거다. 물론 그런 소정의 목적도 있겠지만 사실 두 분은 이렇게 바람 쐬는 걸 좋아하신다. "딸 집에 오니 펜션 놀러 온 것 같고 좋으네-" 하며 바리바리 음식 싸들고 오시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참 정답다.
우리 가족은 나가서 사 먹기보다는, 정말 어디 리조트라도 간 것처럼 집 안에서 맛있는 요리 해 먹으며 시원한 에어컨 아래에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걸 더 좋아한다. 휴양지가 어디 따로 있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근사한 음식 한 상과 식후엔 차가운 아이스커피를 즐기며 늘어지게 낮잠 잘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거기가 바로 최고의 지상낙원일텐데.
오후엔 오랜만에 백화점 나들이에 나섰다. 소녀감성을 가지신 어머니는 근사한 그릇 구경을 좋아하시기에 늘 그렇듯 그릇 매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 그릇에 큰 관심이 없었던 나는 여느 때처럼 유유자적 어머니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녀석들이 있었다.
이전에도 내가 이 그릇을 알았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그릇 속 그림들. 사람 냄새 가득한 따스하고 정감 가는 그림체, 보기만 해도 마음이 포근해지는 몽글몽글한 감성의 색감, 어릴 적 농장 체험을 하러 갔을 때와 같은 정겨운 시골 풍경.. 그릇에 관심 많은 누군가라면 아! 하고 단번에 고개를 끄덕일, '빌레로이 앤 보흐'사의 '디자인 나이프' 시리즈다.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들 (좌) A Country Wedding / (우) The Quilting Bee
이 접시들을 보자마자 떠올린 건 '그랜마 모지스'라고 불리는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들이었다. 모지스 할머니는 전원적인 시골 마을의 풍경을 주로 그렸는데, 그 당시의 소소한 일상을 일러스트풍으로 아기자기하게 표현하여 보기만 해도 따뜻하고 즐거워지게 된다. 그러나 그릇 속 그림들은 모지스 할머니가 아닌, 프랑스의 민속화가 제라드 라플라우(Gerard Laplau, 1938-2009)의 작품이었다.
선뜻 누구의 그림인지 잘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제라드 라플라우는 지금만큼이나 그 당시에도 유명한 화가는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의 그림이 세계적인 명품 그릇 브랜드에 한 디자인으로 당당히 출현하게 되었을까. 빌레로이앤보흐는 어떤 이유에서 라플라우의 그림들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 것일까.
'행복'을 담은 그림, '예술'을 담은 그릇, 제라드 라플라우와 빌레로이앤보흐
제라드 라플라우(Gerard Laplau, 1938-2009)
마음속에 늘 '행복한 세상'을 품으며 그림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갔던 파리의 한 소년이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아름다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유년 시절을 보냈고, 이를 그림에 담아내고자 하는 순수함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그 소년은 곧 회화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가 곧바로 예술가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 익히 알다시피, 인생이란 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 법. 자신의 꿈,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소년에게도 존재했기에, 선택하지 않은 삶의 여러 골목골목을 꺾고, 오랜 길을 돌아가야만 했다.
조금 늦었지만 라플라우는 마침내 어린 시절 품었던 그 빛바랜 꿈을 캔버스 위에서 다시 펼쳐낸다. 다 시들어 말라버린 줄만 알았던 유년 시절의 꿈결 같은 세상은 그의 손 끝에서 무지갯빛 풍경으로 놀랍게 되살아난다.
(좌) Et Son Voile Qui Volait / (우) Cour De Ferme
라플라우의 그림은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다. 먼저 보이는 건 나즈막한 언덕에 오밀조밀 과자집이 모여있는 듯한 사랑스러운 마을. 들판에는 양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그 옆에선 마을 아낙들이 허리를 숙여 바구니에 한가득 무언가를 캐내고 있다. 질경이나 씀바귀가 여기에도 있는 걸까. 그 주위를 신나게 뛰어놀며 놀이하는 아이들에겐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저 바람결에 흩날리는 분홍빛 벚꽃잎을 잡으며 들판을 마음껏 달려갈 뿐이다.
마을 광장으로 자리를 옮겨보면, 이전의 고즈넉한 분위기와는 달리 무척이나 경쾌하고 활기찬 전경이 등장한다. 무언가 지나가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워보노라면 마차 끄는 소리, 수레 옮기는 소리, 타닥타닥 지팡이를 짚고 산책하시는 할머니의 발소리까지. 소, 닭, 돼지, 토끼, 공작 등 사람보다 동물들이 더 많아 시끌벅적한 이 곳의 아침 풍경은 낯설지만 무척이나 정겹다.
라플라우는 이처럼 자신이 어릴 적 보고 자랐던 시골 마을을 포근한 기억 그대로 그림에 담았다. 어디선가 은은하게 댕댕댕- 종소리가 울릴 것만 같은 여기는 생생한 삶의 터전이자 매일매일 크고 작은 축제의 현장이다. 이곳에서 그들은 일하며 살아가고, 기뻐하고, 웃고, 행복해한다.
'빌레로이앤보흐'(이하 빌보)는 그 당시에도 이미 이름 날리던 독일의 유명 그릇 회사였다. 빌보는 라플라우의 그림을 1978년 유니세프의 크리스마스 카드에서 처음 접했다. 라플라우가 자신의 그림을 크리스마스 카드로 만들어달라고 작품을 보냈었던 게 빌보의 눈에 띈 것이다. 그들은 라플라우에게 '우리 회사의 그릇에 넣을 만한 그림 시리즈를 제작해달라'고 요청했고 그 이듬해인 1979년, 라플라우의 그림을 테마로 한 '디자인 나이프(DESIGN NAIF)' 라인이 세상에 나오게 된다.
(좌) 웨딩 / (중) 크리스마스 / (우) 마을
빌레로이앤보흐는 라플라우의 그림들을 테마로 여러 시리즈를 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웨딩' 그리고 '크리스마스' 시리즈. 시골의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풍경, 여유롭고 평화로운 소박한 마을 사람들의 삶을 주제로 한 그릇들로 디자인 나이프 라인은 금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멋진 협업의 결과로 빌보는 도자기 시장에서 더더욱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라플라우도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으며 인지도를 높이게 된다.
그런데 빌레로이앤보흐는 '왜 하필' 제라드 라플라우의 그림을 택했을까? 그 당시 라플라우가 아니더라도 이미 대중들에게 익숙하고 잘 알려진, 유명한 화가들은 많았을 거다. 그들에 비해 라플라우의 그림은 사실 특별하게 '잘 그려진' 그림이 아닐뿐더러, 명품 브랜드라는 이미지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느낌이 강하다. 로얄 코펜하겐, 웨지우드 등과 같은 여타 브랜드 디자인과 비교해보자면 라플라우의 그림은 단순하고 유아틱 해 보이기까지 하니 말이다.
(좌) 로얄코펜하겐 / (우) 웨지우드
그러나 바로 그런 지점에서, 빌보와 라플라우의 '디자인 나이프' 시리즈가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이 지향했던 것은 바로 '나이브(naive)'함이었다. 우리말로 하면 '순진한, 천진난만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 단어는 '디자인 나이프(Naif)'의 모티프이자 기본 철학이다.
라플라우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지상낙원을 발견해내는 어린아이의 눈을 가진 화가였다. 단순한 일러스트처럼 보이는 그의 그림을 자세히 바라보다 보면 곧 그의 정교함과 섬세함에 반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 이토록 사랑스러운 것이었나 하고 새삼 놀라게 된다. 이처럼 그의 그림은 우리 내면의 'naive'함 즉, 순수한 동심과 어린아이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 꼭 그림과 똑같은 추억 속 장면이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일단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도 저곳에 가고 싶다, 어릴 적 순수하고 마냥 행복했던 그 시절의 감성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다, 하는 그런 마음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림이 쉽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그림에서 어떤 감정이 떠오르는지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고 직관적으로 캐치가 가능하다. 어렵지 않고 단순한 묘사와 밝은 색감, 평화로운 모습을 소재로 한 그의 그림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라도 와 닿을 수 있는 따뜻한 그 무언가가 분명히 있는 셈이다.
이런 특징들을 가진 그림을 우리는 Naive Art(나이브 아트)라고 부른다. 나이브 아트란 '전문적인 미술교육 없이 그림에 대한 순수한 즐거움을 가지고 그려낸 작가들의 작품'을 지칭하는 말입이다. 대표적인 나이브 아티스트로는 우리의 제라드 라플라우를 비롯해 모지스 할머니, 앙리 루소, 카미유 봉부아 등이 있다. 이들의 그림은 기존 그림과는 달리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로운 묘사, 순수한 색 사용, 단순하고 평면적인 공간감 등이 특징이다. 기술적으로는 어린아이가 그린 것처럼 미숙할지 몰라도, '일상의 행복'이라는 주제를 마음 다해 그려낸 이들의 그림은 우리에게서 유쾌한 즐거움과 공감을 이끌어낸다.
바로 그와 같은 이유에서 빌레로이앤보흐가 라플라우의 그림을 택한 것이 아니었을까.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식사할 때 라플라우의 정겨운 그림들이 식탁 위 행복을 더해주었으면, 그릇이 비어갈 때쯤 나타나기 시작하는 바닥의 순수하고 정다운 그림들로 다시 행복이 채워졌으면 하는 그런 작고 소박한 바람에서 말이다.
디자인 나이프 시리즈에는, '그릇은 음식뿐만 아니라 행복도 담아야 한다'는 그런 신념이 묻어나는 것 같다. 화려하고 기품 있는 그릇으로 격식 차릴 필요 없이 그저 '지금, 여기'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집중하자고 말하는 듯한 식탁 위 작은 그릇들.. 빌보가 그릇에 담고 싶었던 것은 음식의 맛 외에도 그 음식과 함께한 순간이 가져다주는 기쁨, 추억, 행복이었나 보다.
작은 것들을 위한 그림
라플라우의 그림 속 세상에서는 등장하는 모든 존재가 반짝반짝 빛나며, 모두가 주인공이다. 작은 것 하나도 생략하거나 소홀히 그리지 않고, 마음 들여 표현해내었다는 것은 그림을 보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누구 하나 빠짐없이 자신의 일상에 열심인 생기발랄한 모습은 매력적이며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른하게 좋아진다.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아마도 이런 느낌일까?
어릴 적에는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하고 황홀했다. 아침 학교 가는 길은 매일 똑같은 길인데도 늘 새로운 세상이었달까. 보도블럭 그 조그만 틈 사이로 핀 노란 민들레, 그 옆에 열심히 무언가를 이고 낑낑 거리며 지나가는 깜장 개미들, 담벼락을 타고 올라간 연둣빛 덩굴과 연보랏빛으로 수줍게 물든 나팔꽃, 그 사이로 간간이 맺혀 있는 투명한 아침 이슬..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어찌나 많은지 일찍 집을 나섰는데도 학교에 지각한 적인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끔은 그런 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크게, 멀리 보라'고 누군가는 말하지만, 때론 시야를 좁혀 눈앞의 '작고, 가까운 것'을 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지금 여기 내 눈앞에 있는 사람들, 꼭 크고 중요한 일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매일 마주하는 사소한 일들, 근사한 바깥 음식도 좋지만 자신 또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만든 집밥.. 다시금 순수한 눈과 마음으로 이 모든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라플라우의 그림을 보며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