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시기면 자꾸만 생각나는 소설들이 있습니다. 타닥타닥- 온 세상을 적시는 빗소리엔 소나기처럼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던 소년소녀의 순수한 풋사랑이 담긴 <소나기>를 떠올리고, 푹푹 내리 꽂히는 장대비가 지겨워질 때쯤이면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라는 그 유명한 마지막 문장이 간절해서 소설 <장마>의 마지막 장을 괜스레 뒤적이죠.
(좌)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g in the Rain), 1954 / (우) 어바웃 타임, 2013
비에 어울리는 영화도 빼놓을 수 없지요. 가을을 재촉하는 소슬비가 내리는 밤이면 눈 딱 감고 우산을 접어버린 채 영화 <싱잉 인 더 레인>처럼 물 웅덩이 위로 발재간을 부리고 싶어 지고, <노트북>이나 <어바웃 타임> 속 사랑스러운 연인처럼 빗 속 로맨스를 꿈꿔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게 '비' 하면 딱 떠오르는 작품은 뭐니 뭐니 해도 허진호 감독, 정우성 주연의 영화 <호우시절>입니다.
동하 曰 "처음 만났을 때 기억 안나? 넌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웃었잖아."
미국이라는 낯선 유학길에서 동양인 남녀가 만납니다. 한국에서 온 동하(정우성)와 중국에서 온 메이(고원원). 서로에게 묘한 끌림을 느끼던 그때의 동하와 메이는 아직 어렸고 서툴렀기에, 떨리는 설렘만 간직한 채 결국 각자 본래의 삶으로 돌아가고 말죠. 시간이 흘러 사회인이 되고 중국으로 출장을 가게 된 동하는 두보 초당에서 가이드를 하고 있던 메이와 기적처럼 재회합니다. 다시 옛 감정에 사로잡히며 점점 더 가까워지는 이 둘.. 이별 직전, 동하는 결국 귀국을 하루 늦춥니다.
소나기처럼 찾아온 만남, 꿈같은 하루.. 다시 떠올린 첫사랑의 감정. 이번엔 타이밍을, 서로의 손을 잡을 수 있을까요?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처럼 이 사랑은 시절을 알고 온 걸까요?
메이 曰 "요즘도 시 써? 나 네가 쓴 글들 참 좋아했는데.."
호우시절(Good Rain Knows When To Come).. '좋은 비는 시절을 알고 내린다'라는 뜻을 가진 이 작품의 제목은 중국의 최고 시인이라 불리는 두보의 시 <춘야희우>의 첫 소절에서 따온 것입니다.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 當春乃發生(당춘내발생)
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 봄이 되니 이내 내리네
이 시는 두보가 성도 초당(지금의 쓰촨성 청두)에 거주하던 시기에 지은 것으로 봄비 내리는 밤에 기쁨을 못 이겨 써 내려간 작품입니다.
두보는 왜 그리도 비를 반가워했을까요? 당시 성도는 겨우내 가뭄이 심하게 들어 민생에 고초가 가득했습니다. 비가 절실히 필요하던 바로 그때, 메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시고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비가 밤새 내리는 것을 보고 기쁜 마음에 이 시를 지은 것이지요. 내려야 할 시절을 알고 때마침 찾아와 준 고마운 비..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메인 테마인 하우지시제(好雨知時節,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입니다.
현실과 낭만 사이, 비 오는 거리를그린 그림
이번에는 미술사에서 비와 어울리는 작품을 한번 찾아볼까요. 아마 여러분도 잘 아는 그림일 겁니다. 인상파 화가 중 한 명으로 파리의 전경을 주로 그렸던 구스타브 카유보트(또는 귀스타브 카유보트, Gustave Caillebotte, 1848-1894)의 대표작 <비 오는 날 파리의 거리>입니다.
구스타브 카유보트, 비 오는 날 파리의 거리, 1877
잔잔하게 내리는 안개비가 파리의 거리를 촉촉하게 적십니다. 습도를 이처럼 그림으로 절묘하게 표현해낸 화가가 또 있을까요? 손을 대면 물기가 뚝뚝 묻어날 것만 같은 그림이죠. 이런 날 아시죠?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가는 빗방울이 내리는 날, '비가 오는 건가?' 헷갈려서 바닥에 고인 물 웅덩이를 유심히 보게 되는 그런 날..
그림 속 파리가 딱 그런 날인 듯합니다.
(좌) 돌 타일 사이에 낀 물빛 비 웅덩이 / (우) 대담한 구도와 사실적인 묘사.. 마치 잘 찍힌 사진같군요
울퉁불퉁 돌바닥에 자꾸만 눈이 가네요. 유럽여행을 할 때마다 무거운 캐리어를 들썩들썩 춤추게 했던, 혹여나 바퀴가 나가버리면 어쩌지 걱정하게 했던 유럽 특유의 돌바닥입니다. 유럽의 옛 흔적을 느끼게 해주는 낭만의 상징이기도 하고요. 돌과 돌 사이 패인 곳에 고여 있는 빗물 좀 보세요. 하루 종일 꽤 비가 왔나 보군요. 그 위를 찰박찰박 소리 내며 걸어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멋들어진 깜장 우산에 올블랙 또는 톤 다운-룩입니다. 파리지앵의 패션센스는 이때도 여전했네요. 덕분에 희뿌연 비안개와 흐린 하늘에도 불구하고 리드미컬한 무드를 느끼게 됩니다.
시선을 돌려 카메라로 사진을 찍은 것만 같은 건물의 원근법과 구도, 화면 상단의 우산 쓴 남녀에도 주목해봅니다. 막 캔버스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사실성이 느껴질 뿐만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되는 영화의 첫 장면 같은 생동감이 작품 전체에 넘치고 있네요.
<비 오는 날, 파리의 거리>와 나란히 출품되었던 (좌) 유럽의 다리, 1876 / (우) 발코니, 1880, 타고난 태생과 환경 때문일까? 부르주아 남성을 자주 화폭에 담았다
카유보트는 이처럼 19세기 파리의 풍경, 파리지엔느의 삶을 가장 매력적으로 그려낸 화가입니다. 그의 그림은 인상주의 화풍에 속하면서도 테크닉이나 구성의 부분에 있어서는 꽤나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사진술의 구도와 기법을 활용한 듯한, 원근과 초점이 살아있는 그림을 그려냈죠. 게다가 '순간적인 사실성'을 중시했던 카유보트는 도시 생활자들의 일상을 사진 찍듯 포착하여 세밀하고 정교하게 묘사해냅니다. 구름 위를 둥둥 떠 다니는 것이 아닌, 현실에 발 붙인 아름답고도 치밀한 예술의 정점을 이루어낸 화가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그를 설명할 때 화가로서의 업적보다도 더 자주 회자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가 인상주의자들의 가장 큰 후원자, 즉 '인상주의의 호우시절'을 담당했다는 사실이지요.
인상파의 호우시절이 되어준 화가
(좌) 카유보트, 아르장퇴유의 강변 / (우) 모네, 아르장퇴유의 붉은 배들 / 아르장퇴유에서 만난 모네는 그 당시 화가의 길을 포기하려던 카유보트에게 격려의 말을 건냈다
파리 상류층 자제로 태어난 카유보트는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부유한 청년이었습니다.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은 데다가 머리까지 좋아서 변호사 시험까지 단숨에 합격했던 그는 요즘 말로 '금수저'에 '엄친아'였습니다. 예술에까지 관심이 많았던 그는 예술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지금은 인상주의의 대표 화가가 된 모네, 르누아르, 드가와 같은 이들과 교류하며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죠.
여기까지만 보면 '다 가졌네! 제 잘난 맛에 살았겠구먼!'하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청년 어찌나 완벽한지.. 마음씨마저 곱습니다. 미술계에 발을 디디며 만나게 된 동료 화가들이 자신과는 달리 가난한 '흙수저'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본격적으로 친구들을 후원하기 시작합니다.
카유보트, 이젤 앞의 자화상, 1879-1880 / 카유보트는 동료 화가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를 사들였다. 그리고 그림의 일부를 본인 자화상에 그려 넣었다.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 1876
물질적으로 비교적 풍요로웠던 카유보트는 동료 화가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원조했습니다. 어떤 방식이었냐구요? 그들의 그림을 직접 구매해주기도 하고 인상파 전시회를 여는 데 금전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으며, 생활이 어려운 이들에게는 생활비, 화실 임대료 등을 지원해주기도 합니다.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르누아르와의 일화입니다. 르누아르의 명실상부 대표작인 <물랭 드 라 갈레트>, 바로 이 작품을 카유보트가 사들인 것인데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자신의 자화상 뒤편에 이 그림의 일부를 그려 넣습니다. <이젤 앞의 자화상>이라는 그림의 뒤쪽 벽면을 보세요. 르누아르의 그림이 떡- 하니 걸려있지요?그리고 사후에는 자신이 수집한 약 67점의 인상주의 작품들을 국가에 기증하고자 하며 후원자이자 컬렉터로서의 사명을 다합니다. (그러나 아카데미의 반대로 이를 거부했다가 뒤늦게 후회했다죠..)
카유보트, 정원사들, 1875-1877 / 정원을 가꾸는 걸 즐겼던 카유보트
그 당시 인상주의는 예술계에서 인정받던 사조가 아니었습니다. 인상파의 '인상(Impression)'이라는 이름도,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본 사람들이 "이건 제대로 된 그림이 아니라 자신의 {인상}을 휘갈긴 것에 불과해"라고 비웃던 것에서 비롯되었지요. 팔리지 않는 그림, 사람들의 무시와 조롱, 전시회를 열기 조차 어려운 막막한 상황.. 절망과 생활고에 빠져 있던 인상파 화가들에게 카유보트는 마치 '가뭄 중에 때맞춰 내리는 좋은 비'와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요?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던 인상파들의 그림은 카유보트 덕분에 헐값에 팔리거나 사라지지 않고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고, 전시로 사람들 앞에 설 수 있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오르셰 등과 같은 미술관에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훗날 르누아르는 "만일 카유보트가 후원자로서 너무 도드라지지 않았다면, 그는 좀 더 화가로서 제대로 대접받았을지도 모른다"라고 회고했습니다. 그만큼 그가 화가로서 그리고 후원자로서 인상주의에 미쳤던 영향은 지대했습니다. 조금 부풀려 말하자면, 그의 적절한 도움과 지지가 없었다면 몇몇 화가들은 작품 활동을 지속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아름다운 인상주의 그림들이 이만큼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요. 아무도 가꿔주지 않았던 메마른 땅에 촉촉한 단비가 되어준 카유보트 덕분에 인상주의는 그 거대한 발전의 싹을 틔울 수 있게 됩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좋은 비'였을까
앞서 얘기한 영화 <호우시절>의 감독은 제작노트에서 '정말 때 맞춰 무언가 오는 상황을 영화로 그려내 보고 싶었다'라고 말합니다.
카유보트, 비 오는 날의 예르 강, 1875
저는 감독의 이 말을 들으면서 문득 카유보트와 인상파 동료들의 스토리가 생각났습니다. 예술에 대한 열정과 절박함, 생고의 사이에서 갈등하며 고뇌하던 인상파 화가들에게 때를 맞춰 적절한 지원을 해줌으로써 진정한 <하.우.지.시.젠>이 되어 주었던 카유보트..
정말 좋은 비는 그런 것이 아닐까요? 누군가의 마음이 아프고 쓰라려 이윽고 쩍쩍 갈라져버린 논바닥처럼 황폐해져 갈 때, 두보가 살았던 성도에 내린 달디 단 봄비와 같은 것 말입니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떤 비(雨)일까요? 누군가의 부모로서, 자녀로서, 또는 직장 동료로서, 친구로서, 때론 누군가를 가르치는 자로서 때에 맞춰 가장 적절하게 단비를 내려주는 그런 호우(好雨)와 같은 존재일까요? 아님 애꿎은 장마처럼 의미 없이 쏟아지는 그런 무익하고 무심한 음우(陰雨)일까요?
내 인생이라는 텃밭에 누군가 촉촉한 단비가 되어주었듯이, 나 또한 누군가의 '호우시절'이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