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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밝음 Sep 25. 2024

할머니의 된장국

그릇을 비우며 마음을 채웠던 날들

 어둡고 고요한 거실을 지나 부엌에 다다르면 천장의 불을 켜는 것으로 아침을 연다. 조심스럽게 가스 밸브를 열고 타다다닥 소리와 함께 가스레인지 불을 켠다. 냄비뚜껑 사이로 익숙한 냄새가 흘러나와 코를 건든다. 국과 찌개 그 중간 어디쯤인 애매한 묽기의 된장국. 오늘 국인 건지 어제 국인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매일 먹었던 된장국이다.


  할머니의 된장국은 심플했다. 호박, 양파, 파, 고추가 전부다. 가끔은 미더덕을 넣기도 하셨고, 다시 국물로 쓰인 멸치를 건져 내지 않고 그냥 둥둥 띄워두기도 하셨다. 할머니의 아들인 아빠는 그걸 질색했지만, 부재료가 하나라도 더 들어간 느낌이라 난 그마저도 싫지 않았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새벽 일찍 등교했고 밤늦게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했다. 그러니 보통의 날에 집에서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먹거리였던 셈이다. 널따란 국그릇에 된장국을 한 사발 퍼 넣고 밥솥에 있던 고슬고슬한 쌀밥도 한 주걱 텀벙 집어넣는다. 숟가락으로 휘휘 저은 된장 국밥은 가스레인지 옆에 그대로 서서 입으로 가져간다. 밥을 씹어먹는다고 하기에는 머쓱하다. 그야말로 후루룩후루룩 퍼 올려 삼키는 것이다.


 한겨울이라도 그 된장국 한 그릇이면 가슴 속 심장까지 뜨끈해졌다. 된장 국물과 함께 알알이 입속을 돌아다니는 밥알들은 오늘 내가 견뎌야 할 무수한 장애물 같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냥 납득해야 하는 것들, 불편하고 거슬리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 나와 이질적인 부분들에 거센 저항감이 들어도 억지 합을 이루어야 하는 그 모든 것들.  아직 오지도 않은 오늘의 일들을 된장 국밥을 삼키며 예행연습을 했다. 입에 들어온 이상 그것을 삼켜야 하는 것처럼 내 삶에 벌어진 이상 수용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생각한다. 


 혼자 있기를 좋아했고 집에 있는 것으로 (그것도 꼭 내 방에 있어야) 에너지가 채워지는 나로서는 아무리 친구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하루 종일 해야 하는 단체생활은 진을 빠지게 했다. 점심 급식은 훨씬 메뉴가 다양하고 영양사의 전문성까지 더해졌을 텐데 학교에서 먹는 밥은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맛있는 거 좋아할 나이에 매일 먹는 된장국이 싫을 만도 했을텐데 나는 그 지겨움에 투정은커녕 사랑으로 느끼며 살았다. 구수한 냄새, 할머니의 냄새, 줄 수 있는 것의 전부를 끓인 냄새. 나는 그런 된장 냄새가 좋았다. 아침부터 먹은 된장국 냄새가 교복에 베이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날도 있었지만, 할머니의 된장국이라도 먹고 나가지 않으면 하루 종일 교실 생활을 버티느라 곤욕을 치러야 했으니 내겐 최고의 조식이라고 해도 될법하다.


 오랜만에 가을이 제철인 꽃게를 넣어 된장국을 한 솥 끓였다. 옛날처럼 밥도 같이 말아서 들이켜본다. 깨끗이 비워진 국그릇을 보며 그때도 지금도 내가 먹은 건 단순히 된장국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가족의 사랑이다. 그렇게 또 하루를 버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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