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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밝음 Oct 03. 2024

나를 일으켜 세운 말

나의 이름

어릴 때 나는 별명 부자였다. '새우', '단춧구멍', '스누피', '도우너'. 키도 작고 눈도 작아서 이 세상 작은 것들과 모조리 엮여야 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늘 별명으로만 불렸다. 평생 그렇게 불려서 그런지 정작 진짜 내 이름은 낯설고 어색하게 느끼며 살았다. 계속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내 이름이 낯설다 못해 싫어지기 시작했다. 


일단 흔해서 싫었다. '김수현'이라는 평범한 이름. 성이 다른 수현이도 수두룩했고, 성까지 같은 수현이는 남녀 구분 없이 많았다. 안 그래도 평범한 외모인데 이름까지 흔하니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친구들의 특별한 이름을 흠모했다. '새미', '스람이', '너울이'. 세월이 흘러도 잊지 못할 그 이름들이 부러웠다.


내 이름이 싫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아빠의 고의적 작명 의도 때문이었다. 화학공학도 출신임에도 첫째 딸인 내가 태어났을 때 작가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당대 최고의 극작가였던 김수현 작가님의 필명을 한자까지 똑같이 따서 지었다. 비극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글을 잘 쓰기 바랐던 아빠의 바람과 달리 나는 체육과 음악을 좋아했다. 대신 내가 아닌 동생이 글쓰기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교내외 상을 휩쓸었다. 벽에 걸려있는 동생의 시화를 보며 매일 뿌듯해하셨다. 그런 아빠를 보며 내 이름이 더 미워졌다. 이름을 잘못 지어서 나와 어울리지 않는 옷을 평생 입고 사는 것처럼 느꼈다. 설상가상으로 동생은 국문학과까지 진학했고 그 모습을 보며 글쓰기와 나는 인연이 없음을 단정했다.


몇 년 전 큰마음을 먹고 오래 간직하고 있던 개명 숙원사업을 진행했다. 철학관에 가서 새 이름을 받았다. '김가림'이라는 이름을 골랐다. 평생 원했던 특별한 이름을 받게 된 것이다. 새 이름을 들고 법원에 개명신청을 하러 가려던 순간 갑자기 멈칫거리는 마음을 만났다. 


'나는 미우나 고우나 내 이름으로 죽고 싶다.'라는 마음.

헤어짐의 순간이 오자 그제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명징해졌다.


어릴 때 늘 교과서나 물건에 '김수현☆'을 매직으로 대문짝만하게 썼다. 중학교 친구가 칼로 직접 오려서 만들어준 커다란 내 이름을 결혼할 때까지도 책상 유리 아래 끼워 두었었다. 가끔 누군가 '수현~'이라고 불러주면 낯설지만 좋은 기분이었다. 불러주는 이름 한 번에 안개처럼 흐렸던 내가 뚜렷해지는 느낌이었다. 싫어하고 미워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내 이름이 어색하게 느껴질수록 더욱 내가 되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내 삶을 버티게 해준 건 오직 내 이름 세 글자였다. 넘어지고 흔들릴 때마다 나를 일으켜준 건 바로 내 이름이었다. 특별할 것 없이 흔하고 평범한 이름이지만 내 이름이니까 그 자체로 소중했다. 이 세상 그 어떤 김수현도 이 김수현은 아니니까. 


내 이름과 화해하고부터 매일 재미있게 글을 쓰고 있다. 전공자가 아니어도 배우지 않아도 쓸 자유가 나에게 있다는 걸 알았다. 내겐 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고, 쓰는 것을 이행하는 것만으로도 쓸 자격은 충분하다는 걸 알았다. 결국 내 이름이 나를 쓰게 만들었고 쓰는 것으로 나를 일으켜 세웠다. 이렇게 평생 쓰는 사람인 김수현으로 살아간다면 나는 이름 대로 된 것 아닐까. 오늘도 나는 김수현으로서 당당히 쓴다. 쓰이기만 해도 쓰일 이유를 다하는 글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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