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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림 Jul 05. 2020

사무실에서 다도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21세기다우면 뭐 어때

사무실에 출근해서 하는 아침 루틴이 있습니다. 우선 컴퓨터가 켜지는 동안 손을 씻고 와서 밀린 메일과 다이어리를 확인하고요,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하는 시급한 일이 없다면 도자기 텀블러와 유리병을 들고 정수기로 향합니다. 텀블러와 병을 따뜻하게 데우고, 텀블러에만 뜨거운 물을 잔뜩 담아 자리로 돌아와요. 서랍에서 오늘 마실 차를 꺼내 찻잎을 두 스푼 덜어 유리병에 넣고 곧장 뜨거운 물을 옮겨 붓습니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물티슈로 닦으며 2분 정도 기다리고, 우러난 차를 다시 도자기 텀블러에 옮겨 부으면 끝. 오전 내내 마실 차가 완성됩니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어 유리병이라고 했지만 딱 사무실에서 쓰기 좋은, 차 주전자의 가장 모던한 형태라고나 할까요. 취직도 하기 전에 이걸 미리 사뒀던 스스로의 혜안에 감탄하며 차를 우립니다.)


제가 왜 아침마다 출근하자마자 차를 마실까요? 부족한 아침잠으로 카페인이 필요해서? 그럴 때도 있지만 주된 이유는 아닙니다. 제가 매일 아침 차를 마시는 이유는, 이렇게 차를 준비하고 우리는 동안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할 일은 어떤 것들이 있고, 우선순위가 어떻게 되며, 이걸 해결하기 위해 누구와 어떤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지 차근차근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차분한 마음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잠깐의 여유를 누리며, 혹시 누군가 업무 도중 나를 열 받게 해도 정중하고 성숙하게 대해야지 다짐합니다. 현대 직장인을 위한 빠르고 간단한 정신 수양 꿀팁으로 소개해도 되겠네요.





눈치채셨나요? 저는 회사에서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차를 마시고 있습니다. 심지어 오후에도 마셔요. 다만 오후 업무가 끝나면 재빠르게 퇴근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도자기 텀블러에 티백만 퐁당 담급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팀원들은 이 모습을 매일 보는데도 제게 취미가 무엇이냐, 주말에는 주로 뭘 하냐 물었을 때 차를 마신다고 대답하면 그들은 놀랍고 새로운 정보라는 듯이 반응합니다.


"다도? 혹시 막 한복 입고 앉아서 조신하게 하는 그거?"

"에이, 설마요. 젊은 아가씨가 그러겠어요. 호텔 가서 애프터눈 티 마시겠죠. 그렇죠?"

"아아, 그거~. 비싼 취미를 가졌네."


저는 그냥 차를 마신다고만 말했는데 벌써 당신들끼리 의견을 교환하고 결론을 내리는 걸 보면서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고민합니다. 조목조목 반박할까, 대충 그렇다고 말하고 넘길까. 그러다 마침내 왜 차를 마신다는 말이 곧장 '한복 입고 하는 다도'나 '비싸고 화려한 호텔 애프터눈 티'로 연결되는지 생각에 빠집니다.






몇 백 년 전에는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규방에 앉아 마시는 사람, 삼단 트레이에 맛있는 디저트를 잔뜩 쌓아두고 화려한 티웨어를 사용해 하하호호 사교하며 마시는 사람만 차를 즐길 수 있었고, 그들이 차를 마실 때 응당 갖추어야 하는 형식이나 마음가짐이 있었겠지요.

지금은 2020년입니다. 누구나 근처의 아무 카페에 들어가도 밀크티나 녹차 정도는 주문할 수 있습니다. 현대에도 옛날과 같은 방식으로 차를 즐기고 같은 방식으로 마음을 다잡아야 할까요? 아니오, 만약 그렇다면 티백이 왜 나왔겠습니까.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차를 마신다고 하면 앞서 나열한 두 가지 인상을 먼저 떠올리고 차를 멀고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굉장히 다양한 생활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자의 처지가 다르니 필요한 심적 안정감도 다르고, 가질 수 있는 금전이나 시간적 여유도 다릅니다. 이렇게 다양한 환경의 사람들에게 천편일률적인 다도나 차 문화를 적용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될까요? 그냥 각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차를 즐기고, 차를 통해 중심을 잡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제 경우를 예로 들어볼게요.


Case 1. 요즘의 저는 직장인이라 번거롭지 않게 하나의 텀블러와 하나의 유리병 만으로 간단하게 차를 우리고 즐길 수 있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업무 도중 차를 마시겠다며 이삼십 분씩 시간을 내어 음미하기 어려우니 한두 종의 차를 벌크로 사무실에 두고 머리와 마음을 정리하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Case 2. 몇 년 전의 저는 대학생이었습니다. 금전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많았고 이래저래 선물 받은 차도 많았지요. 자취방에 있는 다기라고는 인터넷 최저가로 구한 유리 숙우와 기본형 티팟 각각 하나, 그리고 본가 부엌장에서 가져온 찻잔 두 조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차를 마시며 그 맛에 최대한 집중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생김새며 향, 맛, 입안에서 느껴지는 질감까지 세세하게 찾아내서 기록했습니다.


완전히 다른 두 방식으로 차를 마셔보았지만, 공통적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화났을 때 마시면 차분해지고, 날씨가 좋을 때 마시면 즐거워지고, 초조할 때 마시면 편안해지고, 머리가 복잡할 때 마시면 개운해졌지요. 이런 경험들이 반복되어 마침내 차를 마시는 그 자체에서 오는 만족감이 심리적, 정신적 편안함으로 이어지는 감각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다도茶道'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다도는 한복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한옥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특정한 다구, 손동작, 절차나 형식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차를 행복하게 마시는 것에서 옵니다.






인류가 차를 마신지는 엄청나게 오래되었습니다. 중국의 전설 속에 등장하는 내용을 제외하더라도 주나라 때 이미 차를 공납한 것으로 기록되어있고, 당나라 때 육우가 쓴 최초의 차 전문서적 『다경(茶經)』을 계기로 차가 한반도를 비롯한 주위 국가에 전파된 게 벌써 1,200여 년 전이네요. 차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닌 이상 이렇게나 오래되었다고는 짐작하기 어렵겠지만, 누구나 차의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다고는 생각합니다. 아마 그래서 사람들이 차를 더 어려워하고, 머나먼 전통문화의 영역으로 넣어버리지 않았을까요. 차 문화를 단절시킨 한국의 슬픈 근현대사를 생각하면 애석하게도 자연스러운 결과네요.


차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지만, 바로 그 오랜 시간 동안 차 문화는 엄청나게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많이들 간과합니다. 차를 마시는 방법도 수차례 바뀌었고, 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도구도 그에 따라 계속 변화했습니다. 당연히 절차나 형식, 예법도 달라졌겠지요. 요즘 사람들이 생각하는 '클래식'한 음다飮茶 문화, 그러니까 한복 입고 조신하게 우리는 다도법이나 애프터눈 티로 대표되는 서구 살롱의 티는 차의 역사상 아주 최근의 모습에 불과합니다.


최근의 양식이라 해도 지금 보면 무척 구시대적으로 보이지요. 돈도 시간도 많은 양반님네들이나 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이런 형태로 차 문화가 성행한 이후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지구 반 바퀴를 하루 안에 이동할 수 있게 되었고, 사람들은 한 손에 들어올만한 작은 컴퓨터를 들고 다니지요. 불과 100년 전과 같은 생활양식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바로 이 순간, 차 문화가 계속 달라졌다는 걸 떠올리면 답은 명쾌합니다. 앞으로도 차 문화를 사회와 생활상에 맞게 바꾸면 돼요! 문화는 환경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현대 사회에는 계급도 없고, 개인은 각자의 삶의 방식을 선택합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추어 예전부터 이어지던 방식을 고수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누군가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차를 마신다면, 그로 인해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자신을 돌아보고 보살필 수 있다면, 형식이 달라져도 차茶 안에는 여전히 도道가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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