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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림 Jun 05. 2020

세상은 흘러가는 가운데

관조가 필요할 때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대혼란에 빠진 지도 벌써 삼 개월 즈음되었나요. 국내 상황이 한창 심각했을 때 만난 많은 사람들에게서 이런 말들을 들었습니다.

"그러게 다른 나라 사람들이 못 들어오게 입국 금지했어야지."

"마스크도 진단 키트도 다른 나라 다 퍼다 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


유럽, 미국 등지에서 상황이 더욱 심각해지자 참혹한 소식들이 들려왔습니다. 하루에도 수만 명이 알지 못하는 경로로 감염되자 아시아계 사람들을 향한 무차별 폭행 등의 인종차별이 심해지고 있다는 소식이 떡하니 국제뉴스에 등장하였습니다.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떡하니 자신의 SNS에 혐오발언을 올리기도 했고요.


재난 상황에서 으레 그러리라 짐작되는 배타성의 표출이었는데, 영 듣기가 싫었던 저는 잠자코 차를 마시며 생각했습니다.


저 인간들이 차를 안 마셔서 저래.


뭐, 별 근거는 없지만 일단 저도 귀를 닫고 정신을 다른 데로 돌리고 싶어서 나온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정치적 견해와 무관하게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비효과적이고 더 나아가 비현실적인 방안이라는 점이 분명했기 때문이지요. 전염병 발생 이후 유럽에서 가장 먼저 중국인 입국을 금지했던 이탈리아는 지금 어떻게 되었나요. 잘못된 판단과 대응의 결과가 비참하게도 무수한 죽음과 계속되는 혼란으로 드러나는 와중에도 같은 말을 반복하다니 그냥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와버린 것입니다.





왜 지금 많은 사람들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할까요? 질병으로 인한 불안은 생존을 직접적으로 위협합니다. 전염병으로 인한 전 세계 사망자 수는 시시각각 증가하고 근처 누군가의 확진 소식을 알리는 재난문자 수신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울리는 와중, 감염되지 않고 오늘을 넘길 수 있을지, 이러다 나와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지는 않을지 내내 공포와 긴장 속에서 지내고 있지요. 원초적인 공포에 휩싸인 상황에서 타인을 배려하기는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함께 어려움에 처한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는커녕 일단 당장 자기 자신만 바라보며 외부의 모든 것들을 차단하는 것으로 안정감을 찾고 싶어 합니다. 머리를 땅에 처박는 타조처럼 위험 요소를 제거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퍼져나가는 바이러스를 완전히 막기 어렵듯이, 물질과 비물질 모두 끊임없이 교류되는 이 세계는 언제나 움직이고 있습니다. 잠깐 빗장을 걸고 숨어들었다 해도 언젠가는 울타리 밖으로 나와야 하니, 애초에 이 거대하고 촘촘한 움직임을 수긍하고 좋은 흐름을 잡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겠지요.






차를 마시면 생각이 바뀔까요? 아니오, 차는 총명탕이 아닙니다. 지혜의 샘물도 아니고요.

다만, 차를 마시며 익히는 감각과 마음이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게 합니다.


우선 모든 과정과 요소가 하나로 연결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차를 마시다 보면 의외로 몸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됩니다. 물을 끓여 다구를 골고루 데우고, 찻잎을 적당한 용량으로 덜어 데워진 다구에 넣고 물을 따른 다음, 주전자나 개완에서 숙우로 또 숙우에서 잔으로 따라내지요. 티백을 이용하면 그나마 간단해지는 한편 거듭 우려 마시는 차라면 몇 번을 반복할 것이고, 때로 아이스티나 밀크티로 마시려면 또 다른 동작이 추가되어야 합니다. 말차는 전혀 다른 과정들이 필요하고요.

차를 처음 마시기 시작할 때에는 '이다음은 뭐였지, 어떻게 하더라, 이게 맞나' 속으로 몇 번이고 반문한 후 기어코 찻잔에 차를 따르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무척 편안하게 진행합니다. 제가 잘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익숙해졌기 때문이고, 나열하고 보면 꽤 복잡해 보이는 이 동작들이 사실 걸음처럼 단계별로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하나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실은 역사가 그렇듯이 많은 것들은 서로 원인과 결과로 이어져있습니다. 하지만 일상을 영위할 때에는 아무래도 과업 단위로 사고하다 보니 의식하기 어려운데 차를 마실 때만큼은 다시금 인식하는 거죠. 아, 세상은 흘러가고 있구나.





뿐만 아니라 굉장히 많은 것들이 영향을 주지만, 언제나 마음처럼 만들기는 어렵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차맛을 좌우하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같은 차를 우릴 때마다 똑같이 하려고 해도 어쩐지 같은 맛이 났던 적이 없습니다. 같은 조건에서 하려고 찻잎의 양을 잴 저울, 물의 양을 잴 계량컵, 온도계와 타이머까지 사용하고도 매번 달랐으니, 제가 통제할 수 없었던 변수가 제법 많았던 겁니다. 차는 섬세해서 공기의 상태, 빛, 그 공간의 향에 따라서도 맛이 변하곤 합니다. 심지어 빛과 공기라니, 실험실이 아니고서야 모두 어쩔 수 없는 것들입니다. 차를 마시다 보면 이런 것들에 익숙해집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해지지만, 낙담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이용하거나 보완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됩니다.






동양의 문화는 오랫동안 물아일체(物我一體)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물아일체의 세계관 속에서 나는 지금 이 순간에 녹아들고 피(彼)와 아(我)의 경계는 허물어져 세상과 함께합니다. 그러니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며 그 속에서의 자신도 긍정할 수 있게 되지요. 그뿐일까요. 저 먼 나라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도 사연도 남 일 같지 않습니다. 만물과 더불어 사는 존재임을 인지하면 비로소 진정으로 공감하게 되고, 나를 둘러싼 이 모든 세상이 원래 그러한 상태(本然)로 흘러가도록 조화를 꿈꿀 수 있습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검색 결과)


차는 이런 물아일체의 정신 상태를 비교적 빨리 경험할 수 있게 해줍니다. 슬프거나 화가 났을 때에도 차를 한잔 마시다 보면 들끓었던 마음이 조금 진정되고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조망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음과 생각을 비우고 차를 우리기 위해 하는 동작과 그 시간에 집중하면 내가 움직이는 만큼 세상도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고, 무수한 것들이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기 때문이죠.

그러니 스스로의 안위가 걱정되어 타인을 신경 쓰기 어려워지고 모든 것을 차단해버리고 싶어질 때면 우선 몸을 움직여 차를 드셔 보세요. 물을 끓이고 다구를 데우는 첫 번째 단계부터 찻자리를 정리하기까지 일련의 과정 속에서 흘러가는 시간과, 내 몸의 움직임과, 찻물의 흐름을 차분하게 바라보세요. 이 흐름 속에서 내가 제어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모든 것을 손아귀에 잡아두지 않아도 이 또한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라며 제법 괜찮은 결과물로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깨달을 것입니다. 몇 번을 반복하며 이러한 감각이 익숙해질 때 즈음, 당신은 흘러가는 세계를 비슷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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