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글방 수강생 김저니의 글
방에는 설탕 없는 커피믹스가 있고 사무실에는 원두커피 내리는 기계가 있어요. 그걸 알면서도 가끔 퇴근길에, 다음날 아침에 마시려고 편의점에서 병에 든 커피 따위를 사고는 해요. 맛없는 커피는 좋아하지 않지만 커피 맛이 나는 카페인 음료수라면 그걸로 된 걸까요, 아니면 그저 귀찮음이 미각을 이기는 것일 뿐일까요.
편의점에 따라, 특히 커피 진열장에는 빨간 바탕에 1+1이나 2+1이 없는 가격표를 보기가 더 어려울 때가 있어요. 저는 2+1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혹시 알아요? 그건 사실 1+2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걸요. 하나를 위해서 둘을 더 떠안아야 하잖아요. 그게 싫어서 굳이 단품이나 1+1을 찾고는 했어요.
날이 밝으면 밖으로 나가기 전에 가까스로 그런 걸 마시고는 해요. 직장에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든 아침을 차려먹어 보려고 했었죠. 혼자 먹을 만큼만 준비할 수 없으면 적당히 냉장고에 얼려 두면 될 것 같았죠. 하지만 언제부턴가 아침잠에 지고 말았어요. 또, 뭔가를 한 냄비씩 끓여 놓고 일주일 내내 그걸 처리하는 게 썩 달갑지도 않았죠. 가끔은, 내일은 조금이라도 일찍 출발해 볼까, 일찍 일어나서 무언가를 준비해 볼까, 다짐하면서 알람을 당겨 보고는 해요. 물론 듣지 못하죠. 누군가에겐 기적의 아침이 있다던데, 이 쪽은 하루하루 아침에 일어나기만 해도 기적인데요.
결국 출근해야 할 시간이 임박해서야 뛰쳐나가고, 지하철이 도착하면 조금이라도 나은 자리를 잡으려고, 또 남과 닿지 않으려고 백팩을 앞으로 매거나 몸을 오그려요. 이어폰을 찔러넣고, 그걸 뚫고 들어오는 안내방송으로 언제쯤 차가 출발할지 가늠하고는 하는데, 선곡표가 변하지 않은 지는 꽤 지났어요. 사람이 많아 서 있기 힘들 때면 이어폰도 소리내기를 힘들어해요. 문간에 서 있으면 문을 여닫는 깜박이등에 맞춰서 신호가 더 끊기고는 하죠. 이젠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마저 혼잡하구나, 그럼 다음 월급날에는 무선이어폰을 더 좋은 것으로 바꿔 볼까. 아니, 그런 식으로 큰 돈을 쓰면 뭔가 지는 기분이잖아요. 차라리 갖고 있는 이어폰을, 줄이어폰이 아니라 그냥 이어폰을 다시 써 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데 변환잭을 사려면 또 돈이 나가잖아요. 어찌나 치사한지.
지하철역을 빠져나오면 그래도 사정이 낫죠. 자리에 앉고 컴퓨터를 켤 때까지는 망설이지 않아요. 하지만 화면에 불이 들어온 다음부터가 문제죠. 그렇게 낮의 일이에요. 전화통을 붙잡고는 발주처나 전문가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고, 몇 주째 진척이 없어 보이는 보고서에 뭔가를 더하는 동안 휴대폰은 쥐죽은 듯 조용하죠. 해가 아직 남아 있을 때 컴퓨터를 끄고 나와서 다시 무선이어폰이 지직거리는 지하철 구석에 몸을 싣기를 바라죠.
물론 가끔은 다같이 야근을 해요. 독립해 나온 지 반 년도 안 된 회사라 그런지 다들 사기는 높아요. 하지만 막차 시간을 넘기는 게 문제죠. 이전 회사에서 사무실이 방에서 지하철 역 두 개 정도 거리에 있었을 때는, 다들 택시를 타라며 말리는데도 굳이 방까지 걸어가 보고는 했었어요. 달을 보면서요. 멀리서는 그저 낮아 보이던 언덕들인데, 한 걸음씩 정직하게 걸어낼 때면 어쩐지 높다랗고 아득하지만 계속 갈 수밖에 없는 그런 걸음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출퇴근을 하려면 한강을 건너야 해서, 걸어서 들어갈 엄두를 내지는 못해요. 대신 택시를 타죠. 한 사람을 내려 주고 제가 사는 곳에 들렀다가 나머지 사람들을 내려 주려면 산을 넘는 게 지름길인가 봐요. 산꼭대기까지 가로등이 있고 아파트와 편의점들이 있죠. 왜 이런 곳까지 길을 내고 성채 같은 아파트 단지를 지어서 살고 있을까, 이렇게 바글바글한 곳에서 내 집을 구하기는 왜 그렇게 또 힘든 걸까, 숫자나 통계를 들이대면 쉽겠죠. 하지만 새벽까지 일하고서 그런 걸 떠올리긴 싫잖아요.
방문을 열고 불을 켤 때면, 나 왔어, 형 왔다, 따위를 외쳐 보고는 해요. 흔한 야옹이 집사조차 되지 못했으니 사실 그걸 들어 줄 이는 없어요. 아침에 왜 이렇게 어질러 놓고 나갔는지를 생각하다가,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거나 하면서 가방을 내려놔요. 가끔 가방이 무겁게 느껴져요. 실은 가방 속에 늘 카메라가 있어서 그렇죠. 그런데, 카메라가 그저 가방 속 짐덩이가 되어서 선곡표가 바뀌지 않을 동안 역시 나오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처음 서울에 왔을 땐, 어딜 찍어도 남들이 다 알아본다는 게 당황스러웠어요. 제가 찍는 게 어디인지, 무엇인지, 얼마나 대단한 무언가인지 누군가가 첫눈에 알아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곳은 그것마저도 어려운가 했었죠. 그 생각 때문에 자꾸 손이 가지 않는 것일까요? 그냥 바쁘고 한편으로 게을러져서 그런 거였으면 좋겠어요.
꺼려하는 것들만으로 이야기를 꾸려서 혹 거북했나요. 여태까지 내려왔다면 그렇지 않은 거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아요.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이만큼이나 같은 것을 싫어하는 사이도 함께 오래 가기 좋은 상대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요. 저는 지금 여기 있는 게 최선이지만, 그게 제가 이 곳의 모든 시간을 혼자 마주하고도 괜찮다는 뜻은 아닌걸요. 변하지 않는 건 변하고 있다는 것뿐이고, 여긴 그게 너무 빨라서 늘 낯설죠. 그 쪽은 어떠한가요. 장소가 이럴진대 사람이라고 괜찮을까요. 그 동안 가까웠던 사람들이 죄다 화면 속으로 숨어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혹시 있나요. 하지만 시간을 늦추거나 그 사람들을 다시 꺼내 올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지 않나요. 쓸쓸한 것만큼이나 다시 그들의 삶에 끼어들어가는 것도 내키지 않으니까요. 그러면서도 때때로 당신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건 뭘까요. 공연히 욕심부리는 것 같아 저어하다가도 어느새 바라볼 곳이 있기를 바라고, 꼭 누군가가 내 앞에 이정표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건 뭘까요. 이 낯선 도시에서 나이를 먹는 건 그럴 수 있다 여기면서도, 그저 조신하게 나이만 먹어 가기는 싫다 여기는 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담아두기만 하는 건 이제 그만두려고요. 그래서 미리 말할게요. 같이 가요. 부디.
작가 김저니
다른 종류의 글쓰기로 먹고 삽니다. 간혹 사진을 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