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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 May 17. 2020

잘 그만두기

어떤 배우가 인터뷰에서 근황을 묻는 질문에 한 대답이 인상깊었다.

"요즘은 어떻게 하면 연기를 그만둘지를 생각하고 있어요."

정확한 문장은 아니지만 그러한 내용의 대답이었다. 배우는 이후로도 여러 영화를 찍었다. 그 대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면 팬으로서 슬펐을 것이다. 하지만 은연중에 그 말이 진짜로 연기를 그만두겠다는 말은 아님을 느꼈다.


'어떻게 하면 그만둘지'를 생각하는 건 한창 잘 나가는 배우의 내적 갈등에서만 존재하는 이슈는 아니다. 적어도 내게는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만둘지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나는 회사를 다닐 때마다 언젠가 그만두는 상상을 한다. 힘든 회사일수록 상상 속에서 그만두는 시점이 더 이르긴 하지만, 대부분은 정확하지 않은 미래의 언젠가를 배경으로 하는 상상이다. 상상 속에서 나는 "그래, 이 일은 이만하면 됐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 일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되었고 잘 할 수 있게 된 상태다. 하지만 여기서 더 잘 하고 싶고 이곳에서 '만렙'을 찍고 싶다는 마음은 없다. 그 마음을 확인하고 홀가분한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만두겠다는 용기를 가진다. 그리고 실행에 옮긴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일상을 마주한 나는 백지를 다시 그려갈 힘을 얻는다.


이러한 일련의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사실은 무척 잘하고 싶기도 한데 그런 상상을 왜 자꾸만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만둘지를 생각하는 건 지금 불행하다는 뜻과 동의어가 아니다. 상황이 괜찮을 때도 얼마든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누군가와 잘 만나다가도 이별을 상상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이 경우에는 행복한 현재를 잃어버리는 순간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한 방어책일 수도 있다. 최악을 미리 상상해놓으면 그것을 마주했을 때 조금 더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인 것이다.


무엇을 해도 그만두는 상상을 해야만 하는 습관은 정상일까. 정상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것부터가 언젠가는 그만두어야 하는 구조다. 죽는 모습을 자주 상상하지는 않지만 어떤 소중한 순간은 언제나 죽음과 연관이 있다. 날씨가 완벽한 날 볼에 닿는 바람의 감촉을 느낄 때, 서로 오래 보아온 친구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홀가분해질 때, 여름 밤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새까만 하늘 아래 수천 명의 사람과 함께 뮤지션의 공연을 들을 때, 거대한 스피커에서 터져나오는 음악이 바로 이 순간 공기를 진동시키고 있다는 걸 느낄 때. 한 번은 있고 두 번은 없을 것 같은 그러한 순간들에 나의 무의식은 죽음을 떠올린다.


자의는 아니겠지만 이 모든 걸 그만둘 순간이 올 것이다. 주름이 생기고 무릎이 아파오고 또래 친구들의 죽음을 목격해야 하는 생생한 감각으로서 죽음은 인지되고 예상될 것이다. 볼을 스치는 봄바람과 밤새 나누는 깊은 대화와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 같은 것들을 즐기지 못하는 세상으로 가야만 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죽을지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요즘은 어떻게 하면 잘 죽을지를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인터뷰는 아니겠지만 스스로에게 매일같이 대답하는 어느 시점을 어렴풋이 그려본다. 회사를 그만두는 것과 달리 인생에는 2회차가 없겠지만,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이후의 세계는 우리의 인식 밖이기에 이내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한다. 최선을 다해 그만두는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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