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돌봄과 죄책감은 이제 그만
가부장(家父長)이 뭔지 아세요?
사전적인 의미는 봉건 사회의 가족 제도에서 가족을 통솔하는 등의 권리를 가진 남자 어른이다. 어떤 사전에는 가부장이 가족에 대하여 절대 권력을 가진다고 나와 있기도 하다.
지금은 예전에 비해 많이 변하고 완화되었지만, 과거 우리네 삶을 보면 가부장적인 집이 배부분이었다. 남자 어른의 권위에 억눌려 원하는 것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참고 살아야 했던 여자들의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이 들었다.
먼저 우리 집의 이야기를 해 보겠다.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셨다. 해가 뜨기 전에 들로 나가 어둑어둑해져서야 집에 돌아오는 전형적인 농부셨다. 들에서 일할 때는 부모님이 일심동체처럼 함께 하지만, 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가부장이 시작된다.
아빠는 먼지를 털어내고, 개운하게 씻은 후 누워서 TV를 시청하신다. 집에 오자마자 하룽레 쌓인 피로를 푸는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다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다. 대충 먼지를 털고 손만 씻은 후 일곱 식구가 먹을 밥을 짓는다. 가족들의 저녁식사가 끝나면 그제야 씻고 겨우 누울 수 있다. 바깥일과 집안일 모두를 마치고 나서야 쉴 수 있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의 삶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지만, 사춘기가 되고 철이 들 무렵부터는 아빠가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몹시 미웠다. 반대로 엄마의 삶은 안쓰럽고, 안타까웠다. 하지만 내가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엄마가 조금이라도 덜 힘들도록 집안일을 조금 도울뿐이었다. 엄마의 희생은 언제나 그랬듯 당연한 것이었고, 나에게도 자연스럽게 가부장이 심어졌다.
친정 엄마가 물려준 가부장
어렸을 때, 엄마는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다가, 결혼은 천천히 느지막이 해라."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자기 삶이 고달팠기 때문에 딸은 자신의 삶을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주변의 다른 엄마들과는 달리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보고 했고, 나 스스로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지지해 주셨다. 그런데 내가 결혼한 후 엄마는 돌변했고, 수시로 전화를 하셨다.
"박서방 밥은 잘 챙겨줬냐?"
"왜 아직 밖에 있냐? 박 서방 퇴근 시간 아냐?"
"박 서방이 집에 있을 때는 외출하지 마라!"
통화할 때마다 내 안부보다 신랑 챙기라는 말씀을 귀에 인이 박이도록 하셨다. 어렸을 때도 거의 듣지 않았던 잔소리를 결혼 후에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지금이 조선시대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엄마는 그렇게 싫어하던 가부장을, 딸에게만은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던 가부장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속 깊이 심어주고 계셨다. 자신이 배웠던 것처럼, 자신이 살아왔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당연하듯 신랑의 퇴근 시간이 늦으면 그 시간에 맞춰 저녁 식사를 준비해 같이 먹었다. 새벽 출근을 하는 날에는 5시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차려서 입맛이 없어도 같이 먹었다. 신랑이 쉬는 날이면 대부분의 약속을 취소하고 집에서 신랑과 함께 있었다. 그 당시에 결혼 생활이 처음이라 뭘 몰랐던 건지 그런 생활이 크게 불편하지 않았고, 오히려 행복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때는 가부장적인 삶이 뼛속까지 들어와 있는 줄 꿈에서 생각하지 못했다.
과도한 돌봄과 죄책감
나는 신랑의 스케줄에 따라 점점 바깥 활동을 줄여나갔다. 신혼의 단꿈에 빠져 나의 성장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랑을 위해 식사 후 물을 떠다 주고, 입을 옷을 챙겨주고, 옷을 다 입으면 양말을 가져다주었다. 신랑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까지 모두 다 해주며 과도한 돌봄을 시작했다.
신랑의 퇴근 시간과 나의 출근 시간이 애매하게 겹쳐서 미처 식사 준비를 해 놓지 못한 날이 있었다. 그런 날에는 출근해 일하면서도 계속 죄책감에 시달렸다. 자취를 했던 신랑은 혼자서 식사 준비를 할 수 있고, 뭐든 사 먹을 수 있는 성인이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식사 준비를 해 놓고 출근하려고 발에 땀이 나도록 뛰었다.
몸이 아파서 잠이 든 사이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리면 벌떡 일어나게 된다. 퇴근 후 피곤해서 누워있는데, 신랑이 청소기라도 돌리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다음 날 정리하려고 한편에 놓아두었던 빨래더미를 가져와 개키기도 했다.
내면화된 가부장적 사고방식은 나를 가만두지 않고, 일으켜 세웠다. 한 집에 사는 부부이고, 맞벌이하고 있으니 가사를 분담하는 것은 당연한데, 신랑이 혼자서 집안 일을 하고 있으면 그걸 못 견뎠다. 평등과 가부장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항상 이기는 것은 가부장이었다. 그 결과 마땅히 신랑이 해야 할 일까지 내가 자발적으로 떠맡아서 하게 되었다.
자발적 희생
본가에 일이 있어서 시댁에 가는 날이면 상황은 더 심각했다. 집에서는 한 명의 가부장만 모시면 되는데, 시가에 가면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가부장이 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등을 떠민 것도 아닌데,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했다.
나는 왜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함께 앉아서 그 시간을 즐기지 못하는 걸까?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할 일을 찾아 헤매는 이유가 뭘까? 바로 내면 가부장 때문이다.
밥을 먹다 부족한 게 있으면 먹고 싶은 사람이 가져다 먹으면 되고, 놀다가 필요한 게 있으면 원하는 사람이 찾으면 된다. 그런데 나는 그 모든 것을 '내가 해야 하는 일'로 생각하는 게 문제였다. 그런 모습을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랐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무의식 중에 내 마음속에 심었기 때문에 나에게 자발적 희생은 당연한 것이었다.
내 안의 가부장
아이가 어릴 때, 밤새 고열에 시달린 적이 있다. 해열제를 먹이고, 물수건을 이마에 올려 간호하며 몇 시간 만에 겨우 열을 잡았다. 나도 모르게 "엄마가 미안해."라는 말을 한숨 쉬듯 뱉어내고는 깜짝 놀라서 입을 막았다. 아이가 아픈 게 엄마 탓이 아닌데, 왜 나는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을까? 그때는 몰랐다. 내면 가부장이 모든 것을 내 잘못으로 돌란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이가 아프거나 다쳤을 때, 신랑 혹은 시댁 어른들께서 "엄마가 애를 어떻게 보길래, 아이에게 그런 일이 생겨?"라는 말씀을 하셔서 속상했다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이건 우리가 알고 있는 가부장 중 외부 가부장이다. 타인의 가부장적인 의식이 엄마를 몰아세우는 것이다. 낡은 가부장제 때문에 죄 없는 엄마가 아이를 아프게 한 꼴이 된 것이다.
이제는 버리자. 내 안의 가부장!
그동안 나는, 내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괜히 미안해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일이 많았다.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착한 아이 콤플렉스 정도로 생각했다. 내 안의 가부장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대로 풍습처럼 내려온 가부장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나를 한없이 작게 만들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가부장'을 떠받들고 살았다.
나의 희생으로 모두를 편하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잘못된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까지 내가 대신 처리함으로써 그들을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와 내 주위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 내 안에 깊숙이 자리 잡은 가부장을 들어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