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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아 정씨 May 09. 2020

우리는 행복한 가족일까

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49

5월 8일(격리 54일째) 금요일 한때 비


아침식사를 끝내고 식탁을 나서면서 평소와 다름없이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자, 얼른 씻고 옷 갈아입자. 9시 30분까지 공부 준비해야지.”

“아빠, 오늘 쉬는 날이거든요.”


첫째의 대답에는 정말 답답하게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침부터 우리를 재촉하고 계시는군요, 라는 문장이 생략된 것 같았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어, 그래 몰랐어, 라고 말하면서 나는 오전 스케줄을 시작했다. 주초에 시작한 벽 페인트 칠이 마무리 단계에 와 있었다. 


격리기간에 웬 공휴일이 이렇게 많아, 부활절 방학 2주에, 노동절에, 오늘은 또 뭐지, 라고 생각하면서 달력을 훑어봤다. 빨간색 글씨로 승전기념일이라고 쓰여 있었다. 더 정확히는 ‘Victoire 1945’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기념하는 날이라는 뜻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끝은 8월 아닌가, 라고 생각하며 인터넷을 뒤졌다.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한 날이 5월 8일이었다. 그러니까 독일이 항복한 뒤에도 일본은 3달이나 더 버티고 기어이 원자폭탄을 맞은 뒤에야 항복을 하게 된 것이다. 아이들 공부시키려다 아침부터 내가 세계사 공부를 했다. 5월 8일이 왜 공휴일인지 궁금해서 언젠가 분명히 찾아서 읽어본 것 같은데 그새 까맣게 잊은 것이다. 어려서 배운 것이 중요하다는 게 이런 식으로 증명된다. 


나는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뒤 작업장소인 계단을 향해 갔고, 아이들은 파자마 바람으로 각자 방에 돌아갔다. 오늘 저녁이면 계단의 벽은 새하얗게 될 참이다. 하얀색 페인트를 골고루 섞고 있는 내게 첫째가 와서 아이패드 좀 써도 되냐고 물었다. 플레이모빌로 동영상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내 승낙이 떨어지자 첫째는 조수인 둘째를 불러 자기 방으로 갔다. 스틸 사진을 여러 장 찍어서 빠른 속도로 넘겨 동영상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에피소드는 엄마 아빠와 아이가 둘인 가족이 공항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집에서 엄마 아빠는 아이들을 깨우고, 엄마는 화장을 하고, 아이들 옷을 입히고, 네 가족 모두가 차에 타고, 고속도로를 지나 공항으로 가서, 줄을 서고, 검색대를 통과하는 게 줄거리의 전부이다. 이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 사진을 150장 정도 찍은 것 같다. 줄거리는 간단하지만 장면마다 들어있는 디테일들은 매우 사실적이어서 약간 감탄하게 된다. 분명 대사도 있을 텐데 기술적인 문제로 아직 더빙을 하지 못했다, 고 첫째가 설명했다. 저 가족은 어디에 가는 길이냐는 나의 질문에 둘째는 휴가를 떠난다고 답했다. 첫째가 뉴욕이라고 행선지를 덧붙였다. 


휴가철이 되면 공항을 통해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는 가족. 아이들이 생각하는 행복한 가족의 단면일 것이다. 첫째가 제작한 작품을 보면서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나는 오랫동안 이 문장을 품고 살아왔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들이 충족돼야 하고, 그 여러 조건 중 하나라도 부족하거나 빠지면 불행해질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맞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실제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프랑스 가족들은 그 겉모습이 닮아 있다. 우선 방학이면 어디론가 떠난다. 휴가철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소유의 별장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겨울에는 스키장에 간다. 일상을 더 살펴보면, 일요일엔 성당에 가고, 아이들은 집에서 악기 수업을 하고, 스카우트 활동을 하고, 승마를 배우고, 사립학교에 다닌다. 학과 공부에 뛰어난 것은 물론 예의가 바르고 우애도 돈독하다. 


불행한 가족의 사례는 좀 더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엄마와 아빠 중 한 명만 있다거나, 둘이 있어도 폭력적이라거나, 알코올에 의존할 것이다. 아이들은 방학이든 아니든 TV 앞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서로 싸우는 것은 기본이고 욕설은 옵션일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불행한 가족의 모습은 오히려 보편적이어서 전 세계적으로 비슷비슷하고, 행복한 가족은 나라마다 문화에 따라 그 모습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톨스토이의 저 유명한 문장을 이렇게 다시 써보았다. 


불행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모습으로 불행하지만, 행복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행복하다. 


우리 가족은 내가 사례로 든 프랑스의 일반적 가족 모습과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조건 중 여러 가지가 부족하거나 없지만 우리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첫째가 만든 작품의 시나리오처럼 우리 가족이 휴가를 보내기 위해 뉴욕에 간 적은 없다 하더라도, 아이들 스스로가 이 가족 안에서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은 남들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안니와 아부바카의 관계를 떠올렸다. 어떤 이유에서 이든 손주가 없는 안니는 아부바카를 손주 이상으로 생각하고 아낌없이 준다. 고국인 기니로는 갈 수 없는 형편이어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한 엄마의 가족들과는 전혀 왕래가 없는 아부바카에게 안니는 할머니 그 이상의 존재이다. 아부바카의 지적 수준은 또래 평균보다 훨씬 뛰어나지만 아부바카의 엄마는 전혀 관심이 없다. 오로지 안니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아부바카가 저 상태로 올 9월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면 아마 2학년으로 곧바로 월반을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다. 안니와 아부바카는 서로를 채워주는 존재인 것이다.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가족은 행복하다 말할 수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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