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아 정씨 May 01. 2020

방패와 재봉틀과 김치

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41

4월 30일(격리 46일째) 목요일 흐리고 비


격리 조치가 길어지면서 가정폭력이 늘고 있다는 뉴스는 이제 별로 새로울 것도 없다. 매 맞는 여성들을 위한 긴급구호 초동 조치를 동네 약국에서 할 수 있게 한다거나, 아동 폭력이 전년에 비해 거의 배로 늘었다거나 하는 뉴스들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보이는 눈에 띄는 뉴스를 발견했다. 프랑스 가정의 올 4월 부부신뢰지수가 95로 지수를 발표한 이래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지난달에 비해 8점이 떨어져 평균(100) 아래로 내려갔다고 한다. 


부부간의 신뢰를 수치화했다는 사실 자체가 살짝 놀라웠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좀 알아보니, 내가 이해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프랑스 통계청이 1972년부터 매월 발표하고 있는 경제지표 중 하나인데 한 가정의 구매력이나 저축여력, 재무상태 등을 종합해 그 가족이 미래에 얼마나 자신감이 있는지 또는 불안한지를 수치로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번역을 잘못해서 생긴 오해였다. 부부, 가족, 세대 등의 뜻을 가진 단어를 부부로, 신뢰, 신용, 자신감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를 신뢰로 바꾸자, 부부신뢰지수라는 내 멋대로 번역이 되고 말았다. 굳이 다시 번역을 해보자면, 세대별 신뢰감 지수 정도가 아닐까. 


어찌 됐든 코로나가 각종 경제지표의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국민총생산, 역시 최악의 실업률 등 안 좋은 쪽으로. 그 말이 그 말이 아니었지만, 말이 나온 김에 나와 아내의 신뢰지수에 대해 생각해봤다. 우리가 이렇게 24시간 붙어있는데도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는 이유는, 같은 공간에서 오랜 시간 함께 지내는 일이 우리에겐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사표를 내고 집에서 일을 하거나 집안일을 하고 산지가 10년이 넘었으니, 우리의 함께 지내기 내공도 그 정도 되는 셈이다. 아무리 부부여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24시간 붙어 지내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도 처음엔 부딪히는 횟수가 많았다. 


붙어 지내기의 가장 중요한 노하우는 각자의 공간이나 각자의 취미를 존중해주기, 이다. 내가 아이들의 방패 만들기나 정원에서 잔디 깎기를 할 때는 다른 모든 일에 대해 깨끗하게 잊고 그것에만 집중을 한다. 그렇게 하도록 배려를 해주는 것이다. 나만의 세계에 빠져 있기 때문에 넷째가 아무리 울어도 모른 척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긴다. 이러한 행위에는 일종의 치유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내게 방패 만들기가 있다면 아내가 집중하는 것 중에는 재봉틀 놀이가 있다. 딱 봐도 골동품으로 보이는 휴대용 재봉틀은 장모가 한 5년 전쯤 아내에게 물려준 것이다. 본인이 결혼할 때 선물 받은 것이라고 했다. 80년대 중반이니 30년은 족히 넘은 제품인 거다. 궁금해서 또 인터넷에 물어봤다. 


스위스 브랜드인 elna의 이 재봉틀은 작업을 할 때는 삼면으로 열려 위에서 보면 꽃잎처럼 생겼다. ‘로터스’라는 별칭은 그래서 생긴 것인데, 1960년대 말부터 생산된 것이라는 설명을 찾았다. 비슷한 모델의 제품이 무려 뉴욕의 MoMA에 전시돼 있을 정도다. 골동품 맞다, 우와. 닫으면 매우 작아져서 휴대에 용이하다. 신혼 시절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장인과 장모는 휴대가 용이한 저 재봉틀과 함께 차드 어딘가로 떠났을 것이다. 아내는 엊그제 재봉틀을 꺼내더니 셋째의 필통과 첫째의 머리 액세서리를 만들었다. 아직은 초보 수준이지만 저걸 하면 무아지경에 빠진다. 아내가 재봉틀에 집중해 있을 때 표정은 아마도 내가 아이들 방패를 만들 때의 그 표정과 같았을 것이다. 


또 하나, 우리 부부의 생활 패턴 중 오래 붙어 지내기에 특화된 장점은 식사 준비를 한 명이 전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뭐 하나라도 한 명이 전담하는 것은 없다. 젖 물리기처럼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빼면 말이다. 나도 내가 요리를 이렇게 자주 하게 될지 몰랐다. 총각 시절에는 원룸에 흔한 전기밥솥 하나 없이 살 정도로 요리에는 문외한이거나 관심이 없었다. 생존을 위해 터득한 삶의 기술이라고나 할까. 지금은 혹시 내가 전담해서 가족의 식사를 책임져야 할 경우가 생긴다 하더라도 한국 요리에 필요한 재료가 없어서 문제이지, 얼마든지 끼니를 제공할 수 있다. 물론 나를 짓누르는 저 근본적인 질문, “오늘 뭐 먹지?”는 사라질 리 없지만 원론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유튜브 만세를 외치지 않을 수 없다. 혼자서는 라면도 못 끓이는 아버지의 아들로서는 일취월장이다. 요리 세계에 발을 들이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 손으로 식사를 준비하는 즐거움을 알게 됐다. 가끔 20~30명이 모이는 가족 모임에서도 한국 요리를 선보인다. 그럴 때면 아내의 친척들이 내게 “너 요리 좋아하냐”라고 묻는데, 난 한 번도 “요리하는 거 좋아해”라고 자신 있게 말해본 적이 없다. 내가 요리를 좋아서 하는 건지 의무감에서 하는 건지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내가 요리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가족들을 위한 요리는 의무감보다 즐거움이 앞서고, 요리하는 것 역시 집중을 했더니 방패 만들기와 같은 치유의 효과가 있다는 걸 깨닫고 있어서다. 어제 격리 이후 두 번째 김치를 담그면서 스친 단상이다. 


오늘 하루 프랑스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로 사망한 사람은 289명으로, 지금까지 총사망자는 2만 4천376명으로 집계됐다. 병원 사망자가 1만 5천244명, 요양원 사망자가 9천132명이다. 입원 환자와 중증 환자는 지속적으로 줄고 있는데, 각각 2만 6천283명(전일 대비 551명 감소), 4천19명(전일 대비 188명 감소)인 것으로 조사됐다. 완치자는 5만 명가량이다. 앙리 고모부는 사망자 수가 아니라 완치자 수에 포함될 확률이 높아졌다. 최근 큰 아들 기욤이 단체 대화방에 올린 문자에 따르면, 앙리 고모부는 의식을 되찾았고 조금씩 기력을 끌어올리는 중이라고 한다. 의료진들이 기적적이라면서 축하해줬단다. 기욤은 오랜만에 병실에서 아버지와 한 시간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면서 기쁨을 전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염려와 기도를 전했더니, 앙리 고모부는 당장 전화로 그 모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게 너무 아쉽다고 했단다. 격리가 해제되면 완치된 앙리 고모부를 보러 갈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여기서 파리까지는 100킬로미터가 넘는 관계로 그러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 멀리서 쾌차하길 응원하는 수밖에. 

이전 12화 심심할 틈이 없으니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