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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아 정씨 May 02. 2020

잔디 깎다가 엄마 생각

프랑스 지방도시에서 쓰는 방콕일기 42

5월 1일(격리 47일째) 금요일 흐림


노동자의 날을 맞이해 육체노동에 나섰다. 오랜만에 잔디를 깎은 것이다. 격리 기간 동안 잔디를 깎은 횟수는 오늘까지 최소한 4번은 되는 것 같다. 따뜻한 날씨에 가끔 비까지 내려주니 잡초와 잔디가 무럭무럭 자랄 환경이 확보된 탓인 듯하다. 예초기로 우선 가장자리를 다듬은 다음에 잔디깎기 기계를 돌리는데 예초기로 작업을 할 때면 항상 가슴 한편이 뜨거워지면서 고향의 엄마 생각이 난다. 예초기를 처음 보고, 처음 만져보고, 처음 작동해본 것은 군대 시절이었다. 


제대를 5개월쯤 앞두고 있던 어느 날, 행정반에서 호출을 했다. 갔더니 어떤 상사가 나보다 한 달 위, 나보다 한 달 아래, 나 이렇게 병장 셋을 모아놓고 너희들은 다음 주부터 수목관리반으로 출근해라, 라는 통보를 했다. 비행장 내 녹색 지대의 청결 유지를 책임지던 수목관리반의 팀원들은 원래 단기사병이었는데, 그 제도가 없어지면서 현역들이 그 일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각 대대에서 서너 명씩 차출됐다. 이런 건 이병들한테 시키는 것 아니냐고 항변해봤자 소용없었다. 너희들 가면 덜 시키겠지, 라는 되지도 않는 답이 행정반을 나가는 우리의 뒤통수 뒤로 돌아왔다. 


기간은 세 달이었다. 수목관리반의 주임무는 제초작업이었다. 비행장의 녹색 지대가 얼마나 많은지는 비행기를 한 번만 타본 사람이면 다 알 수 있다. 활주로에 포장도로를 제외하면 다 잔디다. 물론 그 잔디를 다 예초기를 깎는 것은 아니지만, 도로과 잔디가 맞닿는 곳 그러니까 가장자리는 예초기로 다듬어야 한다. 활주로 포함한 부대 곳곳의 잔디를 적당한 길이로 유지시키자면, 예초기로 깎아도 깎아도 끝이 없다. 여기 끝에서 시작해, 저기 끝까지 해놓으면, 처음에 했던 지역이 다시 웃자라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단순 반복 작업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예초기와 내가 하나가 돼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나는 내 평생 흘릴 땀의 절반 이상을 그 세 달 동안 흘렸다고 말하곤 한다. 


나의 현란한 예초기 실력이 프랑스에서 발휘될 줄, 그때는 전혀 몰랐었다. 시골에 사는, 더 정확히는 정원이 있는 집에 사는 남자들의 뇌 한구석에는 예외 없이 잔디관리 폴더가 차지하고 있다. 프랑스는 특히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하는 문화가 있어서 더 그렇다. 집에 오는 손님들이 잘 정리된 잔디를 보고 칭찬은 하지 않더라도, 관리가 엉망인 잔디를 보면 돌아가는 길에 분명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해, 라고 생각할 확률이 높다.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언제나 깔끔한 상태로 유지시켜야 하는 스트레스가 있는 것이다. 밀밭 한가운데 위치한 처가의 잔디 넓이는 축구장 4분의 1 정도 되는 듯하다. 넓은 지역은 기계가 깎지만, 가장자리나 나무 밑동처럼 까다로운 부분은 예초기로 돌려야 한다. 예초기를 돌리지 않아도 그런대로 정원이 깨끗해 보일 수는 있지만 마감질이 안 된 인테리어 공사 현장처럼 어딘지 부족하다. 잔디깎기의 마침표는 예초기인 셈이다. 


겨울을 제외한 계절에 처가에 가면 아침 반나절 서너 시간 정도를 예초기 돌리는 데 사용한다. 도랑이나 나무 주변, 풀섶과 길가 등 까다로운 부분을 깔끔하게 해 두면 장인이 디젤 모터로 돌아가는 대형 잔디깎기 기계로 나머지 넓은 부분을 도맡는다. 때로는 아이들이 장인의 트랙터 위에 올라타 함께 잔디를 깎는다. 그렇게 장인과 콤비를 이뤄 작업을 끝내고 정원을 바라보면 뿌듯하다. 아들이 없는 처가에서 내가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어느 날, 처가에서 장인 장모를 위해 매우 정기적으로 예초기를 돌리는 내가 한국의 부모님에게 내 실력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에 다다르게 됐다. 딱 한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잔디 깎을 만한 정원이 부모님 집에 없는 관계로 한국에서 예초기를 사용하는 건 주로 추석의 벌초 시즌이다. 시골의 부모님 곁을 떠나 산 지 오래된 나는 도시에서 입에 풀칠하는 평범한 아들들이 그렇듯 추석 이틀 전에야 시골에 오는 철없는 막내였다. 그래서 보통 추석이 오기 2~3주 전에 하게 되는 벌초에 손을 보탠 적이 없었다. 그 해가 몇 년도인지는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는다. 가족 납골당이 조성되기 전이니까, 15년 전쯤 일지 모르겠다. 어쩌다 추석에 앞서 2~3주 먼저 부모님의 집에 왔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아무튼 엄마와 함께 벌초를 하러 길을 나섰다. 엄마는 시원한 물이 든 보냉병을, 나는 예초기를 들었다. 우리 둘은 차로 이동해 산소 몇 군데에 들러 벌초를 하고 내려왔다. 엄마는 "네가 하니까 금방이다."라면서 방학숙제를 끝낸 아이처럼 좋아했다. 묘 주변 벌초는 넓지 않아서 오래 걸릴 일이 없다. 주차하고 산소까지 걸어가는 과정이 번거로울 뿐, 비행장 활주로를 누비던 내게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나는 "별 것 아니네, 이걸 지금까지 누가 했대? 이제 내가 할게요."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나의 말은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그 후로는 단 한 번도 엄마 앞에서 예초기 실력을 보인 적이 없다. 이제 우리 가족이 모시는 조상들의 유해는 가족 납골당에 안치돼 있기 때문에 여러 장소를 돌면서 벌초하는 번거로운 일은 없어졌다. 


우리 집의 정원 넓이는 시골의 처가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어서 예초기에 잔디깎기 기계 작업을 포함한다 하더라도 2~3시간이면 충분하다. 예초기 소리는 제삼자에겐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하지만 작업자에겐 오히려 집중을 돕는 역할을 한다. 칼날에 시원하게 잘려 나가는 풀의 잔해와 칼날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정돈된 잔디를 번갈아 내려다보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이다. 나는 지금도 예초기를 사용할 때마다 누군지 잘 기억이 안 나는 어떤 조상의 묘 앞에서 봤던 엄마의 그 해맑은 표정이 떠오른다. 내 예초기 실력을 더 자주 뽐냈더라면 엄마의 그 표정도 더 자주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처가에서 예초기를 돌린 날 볼 수 있는 장모의 기쁜 표정으로 그 아쉬움을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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