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 호 Jun 25. 2020

나이를 먹을수록 입이 무거워지는 이유

알면 알수록 내가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이를 먹을수록 입은 닫고 지갑을 열라는 말이 있다. 남들이 원치 않는 간섭과 조언은 그만두라는 속담인데 오늘날 꼰대로 지칭되는 사람들을 저격하는 데 사용되곤 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데 사람은 왜 나이를 먹을수록 말이 많아지고 고개를 꼿꼿하게 세워가며 아는 체를 하지 않으면 안달이 나는 것인지 항상 의문이었다.


 우리는 품위 있고 우아하게 나이 들어가는 사람에게 기품이 있다는 말로 존경과 경외를 표한다. 기품 있게 나이를 먹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갖춘 사람들로부터 어떤 특별한 아우라 같은 것을 느끼곤 한다. 기품이 있는 사람, 말을 가려하며 단어 하나를 입에서 꺼낼 때에도 고민하며 꺼내어 놓는 사람을 보기 힘든 이유는 그만큼 자신을 갈고닦는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가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자신을 갈고닦는다는 것은 많은 인내와 노력, 시간이 필요한 행위이다. 항상 소수만이 목표에 도달한다는 자연법칙과도 같은 세상 이치는 여기에도 적용된다.


 노력하며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이는 언어 습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학사와 석사 박사의 차이를 간략하게 알려준다는 인터넷에 떠도는 우스갯소리에서 우리는 가벼운 입놀림과 겸손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학사 - 이제 나는 대충 다 아는 것 같다.
석사 - 모르는 게 조금 있는 것 같다.
박사 -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이처럼 아주 조금 알고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얕은 지식을 뽐내며 남들 앞에서 우쭐대고 싶어 안달이 나는 법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지게 되는데, 항상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 역시도 비판에서 자유롭긴 어렵기 때문이다.


 20대 초반 대학시절의 나는 자의식 과잉이었다. 모든 대화 방식과 주제는 '나'로 수렴되었고, '나'에 관한 것이 많았다. 나의 견해, 나의 느낌, 나의 경험과 나의 행동 등 주로 내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는지, 한 주제에 관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강하게 의견을 피력하며 그것이 당당하고 멋진 행동 양식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이러한 대화 태도와 대화를 이끌어 가며 내가 가진 견해의 근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정말 다행스럽게도 대학을 졸업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그 후로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급격히 말수가 줄어들고 말았다.


 대화에 앞서 자기 검열이 시작된 것이다.

 이 때문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로부터 재미가 없어졌다거나 말수가 줄어들었다는 등의 평가를 받게 되었지만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라는 것의 근거를 따져보는 버릇이 생긴 후로는 도통 어떤 말이든 쉽게 꺼낼 수가 없게 돼버렸다. 그것이 가진 미약하고 얕은 바탕이 드러나는 순간의 모멸감과 부끄러움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끔 술의 힘을 빌려 이성의 끈이 다소 느슨해지는 순간이 오면 옛 습성이 무심결에 드러나버려 또다시 "재미와 유쾌한 분위기 조성"이라는 명목 하에 강하게 나의 의견을 표출하곤 하는데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 날엔 어김없이 휘몰아치는 후회와 수치스러움에 당분간 그 친구들을 만날 수 없을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이러한 이유로 나이를 먹을수록 입이 무거워지는 현상은 주름이 생기는 것과 같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사람들을 보면 아무래도 기괴하다는 생각이 들며 다소 불편한 마음이 생기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간혹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승적 차원, 어른으로써 역할, 후학 양성 등의 이유를 들어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있는데 도대체 얼마나 큰 용기가 있어야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 도저히 감이 오질 않는다.


 태생이 남들 앞에 나서는 기질은 아닌 것 같고 앞으로도 그러한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을 당분간은 가지고 살아갈 것 같으니 때와 장소에 맞게 넘치지 않는 대화 습관을 몸에 익히는 것을 앞으로의 기품 있는 삶을 위한 과제로 삼고 살아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지켜준다는 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