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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Jul 06. 2020

자숙은 누가 부여해 준 특권이란 말인가

시장 논리는 때때로 법도 초월하는 것일까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엔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특히 우리가 많이 접하게 되는 인물들이어서 그런지 연예인의 사건 소식은 항상 뜨겁게 조명된다. 행복하고 건강한 소식으로 대중에게 박수를 받는 경우도 많지만 단순히 비도덕적인 행동으로 사회적 질타를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형사 처벌까지도 가능한 범법 행위를 저지르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사기, 도박, 마약, 성 비위, 불륜, 몰카, 폭행, 음주운전, 뺑소니, 승부조작 등 가히 범죄자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법한 대형사고로 뉴스 1면에 실렸던 연예인들의 이름을 적으라고 한다면 지금 당장 수십 명은 적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중엔 언론 플레이로 인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로 오인받아 억울하게 피해를 보는 연예인도 없진 않을 것이다. 그런 아주 극소수의 사례는 제외하고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자숙은 도대체 어떤 형태의 처벌인가


 문제는 저렇게 범죄를 저지르고도, 태연하게 자숙이라는 명함을 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슬금슬금 친분 있는 MC나 PD가 진행하는 방송 프로그램에 얼굴을 내비치며 멋쩍은 듯한 웃음과, 진심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사과 몇 마디쯤 하고 난 다음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방송가에서 날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무엇이 문제이고 어디가 문제인 걸까.

나는 방송가의 생태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다만 떠다니는 대중들의 소문과, 그간 소위 사고 친 연예인들의 신기하도록 비슷한 형태의 반복되는 행동들을 보며 들었던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을 뿐이다.  


 TV만 안 보면 연예인을 외면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연예인들은 우리 삶 구석구석 파고 들어와 있다. 연예인을 왜 외면하려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답한다. 모든 연예인이 아닌 범죄를 저지른 연예인들을 외면하려 한다고.


 엄연히 법률에 명시되어 있는 형법상의 죄를 저지른 연예인의 노래를 듣지 않는 것, 불륜을 저지른 영화감독의 영화를 감상하지 않는 것, 사고를 친 연예인들이 나와서 웃고 떠드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지 않는 것,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왠지 모를 찜찜한 내 마음에 대한 작은 답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념이라고까지 하긴 좀 오버스럽지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았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행동으로 완벽히 옮겨내기란 정말로 어렵다. 왜 이리도 사고를 치는 연예인들이 많은지. 거르고 거르다 보면 보고, 들을게 점점 줄어든다. 때로는 너무 재미있거나 너무 노래가 좋아서, 연기력이 너무 뛰어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홀딱 홀린 상태가 되어 수줍게 고수해온 나의 생각은 저 멀리 사라진 채로 스리슬쩍 그들의 창작물을 소비하고 있을 때도 있다.


 그러다가 정신이 번뜩 들면 아차 싶은 마음에 뒤늦게서야 구차하게 외면하려 할 때도 있다. 게다가 내가 모든 연예인의 개인 신상을 알고 있을 수도 없기에, 오랜만에 취향에 맞는 작품을 발견해 공들여 감상을 하다가 뒤늦게 그 작품의 창작자가 범법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라도 하는 순간이면 더 이상 그 작품을 감상할 수 없게 되었다는 생각에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을 때도 있었다. 이런 마음을 갖고 있기에,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사고 치지 않기를, 내가 좋아하는 작품의 창작자가 실망스러운 사람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


삶과 작품이 일치하지 않는
예술가의 작품은 감상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성악가 조수미는 말했다. 작품의 가치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작품에 임하는 예술가들의 삶이 온전하고 작품과 완벽하게 어우러질 때 비로소 작품은 생명력을 갖게 되고 우리에게 진짜 감동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예인들의 범죄 행위가 이토록 나를 화나게 만드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이며 나는 왜 그들을 외면하려 하는 것일까?


첫째.
사고를 치고 금세 복귀하는 연예인을 보면 열이 받는다.


 세상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는 기저귀 값이 없어 마트에서 기저귀를 훔쳤다고 징역형을 받고 누구는 비교할 수 없이 큰 죄를 짓고도 형을 살기는커녕 누가 허락했는지 모를 자숙이라는 허울 좋은 변명으로 얼마 간 휴양을 좀 하고 있으면 죗값을 다 치른 것으로 스스로를 용서해버리는 모양이다. 이런 세태를 보고 있자면 도대체 법은 왜 존재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신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에 다다르게 된다.


둘째.
죄를 짓고 진심 어린 사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되는 것에 기여하게 되는 것 같아,
나까지 그가 지은 죄에 가담자가 되는 것 같다.


"연기력으로 사생활이 커버되는 배우"

"범죄자여도 가창력 하나만큼은 탑급"

이런 식의 반응을 현실과 인터넷에서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정말 그런 것일까?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심각한 도덕적 해이 현상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고도 시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얼마든지 재기가 가능한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이 시장 논리로 해결되어 버린다면 도덕과 윤리가 발 붙이고 서 있을 곳은 어디인지 묻고 싶다.


셋째.
그의 소득에 일조하고 싶지 않다.


 티브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그게 무엇이 되었건 간에 내가 그들의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은 그들의 주머니를 불려준다는 이야기가 된다. 죄를 지은 사람이 벌을 받지 않는 것만도 열 받아 죽겠는데 그런 사람의 주머니를 불려 준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자기 환멸의 감정이 솟구친다. 소중한 나의 시간과 비용을 소중하지 않은 그들에게 소비하기엔 너무도 아깝다.


넷째.
그의 생각이 나에게 영향을 끼치도록 놔두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은 우리의 무의식에 차곡차곡 저장되어 어떤 결정적 순간이 왔을 때 우리의 선택과 결정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한데 우리의 무의식 속에 내가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의 생각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장시킨다고 생각하니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그 과정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서 결코 용납할 수가 없다.

 내가 특별히 도덕적인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비도덕적이고 부족한 인간이라고 하면 더욱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명시된 법을 위반할 정도의 중범죄를 저지면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큰 죄를 짓고도 매체에 얼굴을 들이미는 유명인들을 외면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방식의 정의 구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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