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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Apr 16. 2024

가장 사랑하는 한 사람이 떠나가고 있다

아이가 자라는 것이 아쉬운 마음

A: 나 요즘 우리 딸이 너무 커버린 것 같아서 조금 서운해

B: 어떤 점이 서운한데?

A: 그냥 이제 혼자 이것저것 잘하니까 내 손이 점점 필요 없어지는 건가 싶어서, 예전처럼 와락 안기지도 않고

B: 그래 너는 딸이라서 더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우리 아들은 돌도 안 됐을 때부터 날 밀어내서 그냥 그러려니 하는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여섯 살 된 딸이 더 이상 자기한테 안기지 않는다며 서운한 기색이다. 퇴근 후 현관문을 열면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오는 아이의 환한 미소는 그간 살며 겪어본 그 어느 환대보다 따듯하고 활기찬 기운을 전한다. 아이가 조금 커버리면 더 이상 그 충만하고 애틋한 환대를 경험할 수 없기에 부모는 그 소중한 순간을 남기기 위해 카메라 셔터를 쉴 새 없이 누른다. 어린아이가 주는 기쁨이 어디 그뿐일까. 내 작은 장난에도 자지러질 듯 까르르 웃어대는 웃음소리, 먹고 싶은 과자 봉투를 혼자 뜯지 못해 작고 여린 고사리손으로 움켜쥔 봉투를 건네는 모습, 시도 때도 없이 같이 놀자며 그 작은 손으로 최선을 다 해 내 손과 뒷덜미를 움켜잡아 끌어대는 모습, 마음의 안정이 필요할 때면 부모의 품 속에 폭 안겨 웅크리는 모습, 하나하나 떠올려보니 아이를 통해 큰 기쁨을 느끼며 살았다는 것이 새삼스레 실감이 난다.


그런 커다란 기쁨을 주는 존재가 성장한다는 것은 분명 자랑스럽고 기쁠 일이지만 가슴 한편에 아련하고 아쉬운 마음이 동시에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아이가 성장할수록 내 존재가 희미해짐을 느끼기 때문이리라. 아이가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이유는 아이라는 존재의 겉모습이 애초에 귀엽게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아이를 통해 부모는 스스로 생애 가장 큰 존재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는 양날의 검과 같아서 극도의 자기 효능감을 느끼게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도망치고 싶을 만큼 막중한 책임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효능감과 책임감이라는 양가감정을 어깨에 얹고 부모라는 존재는 때로는 무한한 행복을 느끼고 때로는 억겁의 두려움을 느낀다.


친구를 달래고 우스갯소리를 하느라, 아들이라서 나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나 역시 마찬가지 생각을 요즘 많이 하던 참이었다. 유치원만 가도 편해진다는 말처럼 유치원에 가기 전까지 아이는 부모가 곁에 없으면 그야말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젓가락을 콘센트에 꽂으려 한다던지, 조그마한 장난감을 입에 넣으려 한다던지, 손이 닿지 않는 것을 잡으려다가 넘어지려 한다던지, 미끄러운 곳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린다던지... 그래서 아이가 어릴 때 부모는 한시도 아이의 곁을 떠날 수가 없다. 그렇게 사오 년을 한 몸 아닌 한 몸처럼 붙어 지내다가 아이가 나이를 대여섯 살쯤 먹게 되면 스스로 사리분별이 가능해지며 어느 정도 부모의 손을 덜 타게 된다. 그렇게 아이가 성장하며 스스로 해내지 못했던 것을 하나씩 할 수 있게 되고, 하면 안 되는 것을 알게 되어 더 이상 위험한 상황에 스스로를 몰아넣지 않게 됨으로써 부모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효능감과 책임감이 동시에 저하되는 것인데 이는 서운함과 안도감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한다. 아이가 성장하며 부모의 도움이 조금씩 필요 없어짐에 따라 아이 앞에서 거의 신적인 존재로 모든 것을 해결해 주면서 느낄 수 있었던 자기 효능감은 서운함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하지만 그 공백을 다행스럽게도 안도감이 메우게 되는데 손이 덜 가는 만큼 무한 책임의 굴레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세상 일은 신비롭게도 균형을 추종한다. 아이를 대하는 마음 역시 마찬가지인 셈이다. 기쁨과 함께 책임이 따르고, 서운함이 생기면 안도감이 따라오는 법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 변화를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도 같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라는 말처럼 아이는 분명 부모가 온 우주에서 하릴없이 가장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그토록 어여쁜 탓에 "크는 것이 아깝다"는 말을 하며 아이의 현재 상태를 보존하고픈 마음이 든다. 하지만 인간이 세상의 이치를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한 차선책으로 성장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오롯이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음을 달래기 위한 나름의 대답을 서둘러 주워 담아본다. 그렇게 내 인생의 가장 큰 부분이었던 6살의 우리 아이를 떠나보낼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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