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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두리e Apr 03. 2024

자판기 :  설레임과 휴식과 부담스럽지 않은 온기

자판기 같은 사람


오늘 라면 어때?'

한강변 라면 자판기 유행에 맞춰 라면이 조리되어 나오는 자판기가 등장했다. 면은 꼬들꼬들, 국물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와 코 끝을 자극해대는 msg의 향연은 얼른 나무 젓가락을 쩍 쪼개며 한 젓가락 하고 싶은 비주얼이다.


​우리나라 처음 선보인 자판기는 1973년 출산율을 낮추기 위한 정부 정책으로 도입된 피임 기구 자동판매기 였다. 1977년 서울 지하철 1호선에 커피 자판기가 설치되면서 본격적으로 자판기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제 자판기는 커피 뿐 아니라 책, 꽃, 위생용품 등 다양한 제품을 판매하며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비대면 문화의 확산과 기술의 발전으로 나날이 진화하고 있는 자판기, 앞으로 어떤 자판기가 등장해 우리를 놀라게 할까?


​블로그를 처음 시작할 때, 닉네임은 '자판기'였다.


​닉네임을 고민하면서 자판기를 떠올릴 만큼, 한참 멀리서도 누런 직육면체 상자가 보였다 하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발길을 옮겨가게 만드는, 자판기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자판기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은 대학교 시절이다. ​​



야트막한 2층 단대 건물로 들어서는 길은 넓다랗고 쓰레기 한 점없이 늘 깨끗했다. 길 양쪽으로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고, 그 잔디밭에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출퇴근 한다는 김밥 아줌마가 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빨간 고무 다라이에는 검게 동글동글 말아진 김밥들이 얌전히 누워있었다. 깨소금으로 치장을 하고 참기름으로 윤기가 좔좔 흐르는 그 김밥은 속에 든 것이라고는 노란 단무지, 붉은 당근, 빠질 수 없는 계란, 초록의 시금치가 전부였지만 그 어떤 김밥 보다 맛있었다. 학생회관에서 먹은 학식도 어느 정도 소화되었고, 그렇다고 거나하게 저녁을 먹기에는 애매한 오후 3시, 우리는 빨간 고무 다라이 옆에 둘러 앉아 김밥 한 줄을 입 안에 넣고 베어물며 허기를 달랬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1층 로비에 그 길다방이 있다.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커피 자판기 앞, 자판기 커피의 양은 그 자리에 서서 이야기 나누며 마시기에 적당하다. 커피 양은 늘 살짝 아쉬웠다. 그러나 자판기 커피의 밀크 커피 조합은 과히 환상적이다 . 적당한 양의 종이컵 사이즈는 어떻게 나온 것일까? 동전을 넣고 밀크 커피 버튼을 톡하고 누르면, 손아귀에 맞춤으로 들어가는 종이컵이 미끄러져 떨어지면서 곧 뜨거운 물이 쏟아지고 하얀 프림과 커피가 정확한 비율로 배합되어 있는 연갈색 액체가 직사각형 상자 안에 은밀하게 놓여있다. 종이컵 8할을 차지하고 있는 자판기의 달달한 밀크 커피, 그 과학적 비율은 흉내낼 수가 없다.


커피를 홀짝이며 마신 뒤, 남은 종이컵은 우리들의 좋은 놀이감이었다. 바로 컵차기다. 대여섯 명이 원을 그리며 둘러 서서 서로 제기 차듯이 다리를 들어오려 발목을 정조준하여 컵을 차서 공중으로 차 올린다. 컵을 서로 주고 받으며 땅에 떨어 뜨리지 않고 최대한 오랫동안 공중에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집중력과 언제 다리를 들어올릴지에 대한 정확한 판단력, 서로에 대한 신뢰와 성공적인 눈치 작전을 발휘해야 한다. 팔과 다리 뿐 아니라 사지를 흔들어대야 내 앞으로 떨어지는 컵공을 막아낼 수 있다. 이것은 뇌와 몸을 함께 쓰는 전신 운동의 결정판이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도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은 스포츠다. 저녁 학식을 먹고 커피도 한 잔 하고 종이컵 돌려차기 까지 한 판 끝내고 나서는, 우리는 도서관으로, 집으로, 아르바이트하러, 각자의 길로 가기 위해 아쉬운 하루를 작별했었다. 아침을 밝히던 공기도, 우리 눈높이에서 이글거리며 춤사위를 펼치던 해 질녁 공기도, 달달한 밀크 커피를 마시며 들이키던 공기도 그립다. ​​



길을 가다보면 마주하는 커피 자판기는 이제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는 않지만 마음은 그 곳에 머문다. 작은 컵 만큼의 쉼이 있었고 떠들석한 추억이 있었고 작은 돈으로 후한 인심이 있었다.


자판기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돈만 넣으면 원하는 물건이 툭툭 떨어지는 것 처럼, 인간 관계에서 많은 것을 줄 수는 없겠지만 잠시의 쉼터이고 싶다.


여름 날 목이 마르거나, 타인과의 어중간한 시간에 잠시 머무를 곳을 찾거나, 입이 심심하거나, 그저 반갑게 뛰어와서 반기면 족하다. 관계란 것은 항상 깊고 진하게 연결되어야 하고, 사람사이에 있을 때, 잘 살아가고 있다고 나를 속박하던 지난 시간이 있었다. 돌아보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관계 강박에 시달렸는지도 모른다.


관계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 혹시라도 보이면 머물러야만 될 것 같은 자판기처럼, 설레임과 휴식과 부담스럽지 않은 온기를 풍기고 싶다.


​직사각형 자판기는 점점 진화 중이다.


밀크 커피 같은 음료이외에도, 비상용 약, 라면 등, 다양한 자판기가 세상에 선보여지고 있다. 내가 만일 자판기라면 무엇을 팔까? 당신이 그리워하는 기억 속으로 순간 이동하는 상품을 팔고 싶다. 버튼 하나 톡 누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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