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살이라도 어려 보이고 싶다. 두번째 수능시험장에서.
하늘이 파랗다. 바람은 코끝이 살짝 차가울 만큼 신선하다. 내 기분도 상쾌하다.
오늘은 기차를 타고 서울 가는 날이다. 얼마만의 혼자 여행인가. 결혼하고 3년 차 껌딱지 같은 딸을 처음 떼어봤다. ㅎㅎ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오늘이 ‘수능날’만 아니면.. 정말 완벽했을 것이다. 이 ‘운수 좋은 날’ 같으니라고..
만약 낭만적인 기차여행이었다면 하늘하늘한 원피스에 긴 카디건을 코디했을 것이다. 따가운 가을볕을 차단할 선글라스도 챙겼을 것이다. 하지만 기차역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흰색 후드티라니.. 머리도 질끈 묶고 화장도 하지 않았다.
‘수능시험장에서 제일 나이 들어 보이면 어떡하지..’, ‘애들이 흘깃흘깃 쳐다보겠지?.. 끙..
딱 14년 만이다. 18살 때 처음 수능을 본 후 다시 수능을 치는 게..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열 두 동물을 점프해 내가 중3 때 태어난 아가들과 같이 수능시험을 보다니... 난.. 나의 두 번째 수능 경쟁자들의 이모뻘이 된 것이다. 휴..
사실 불행은 예감되었다.
‘수능 폭망’의 징조들이 여기저기 뿌려져 있었는데 내가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것.
4월 어느 날, 봄 햇살을 받으며 3살 된 딸 손을 잡고 서울 언니 집에 상경했었다. 본격적인 수능 공부를 시작한 지 1달이나 지났을까? 둘째 조카 소식과 함께 언니의 혹독한 입덧이 시작되었다. 난 다시 3살 된 딸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잠시였던.. 한 달의 서울 체류 기간 동안.. 난 참 부지런을 떨었다. 딸의 어린이집을 겨우겨우 찾았고, 적응시간도 가졌었다. 언니 집에 딸과 내가 기거할 작은 자취방도 꾸몄다. 바리바리 싸온 짐들과 택배로 부친 수험서들을 가지런히 정리도 해놓았다. 그런데 한 달 만에 다시 내려온 것이다. 하지만 이 모두.. 그러려니 했다. 신이 아닌 이상, 둘째 조카가 그렇게 빨리 우리에게 오리라고 아무도 상상을 못 했으니..
한 달 서울생활 중 내가 한 가장 쓸데없는 짓은 따로 있었다. 바로 수능 시험장을 서울로 잡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팔자에도 없는 서울 나들이를 또 하게 되었다. 하얀 후드티를 입고..
기차역에서 수능시험장까지 어떻게 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버스를 타고 갔는지 택시를 타고 갔는지.. 아니면 걸어갔는지 모르겠다. 수능시험을 볼 때 내가 점심을 먹었는지 바나나와 두유 같은 간식으로 때웠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런데 정말 또렷이 기억나는 것이 있다. 바로 감독관이 눈빛!!
나와 14살 차이가 나는 다른 수험생 아가들은 의외로 나에게 아무 관심도 없는 듯했다. 흘깃이라도 쳐다보는 아가들이 없었으니... ‘역시 요즘 아이들은 시크해~ 나에게 관심이 없어~’ 이렇게 좋아하고 있을 때.. 내 나이뻘 돼 보이는 감독관이 나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다. 앗! 하얀 후드티가 눈길을 끌만큼 너무 새 하얀색인가?..
'날 좀 그만 보게 이 감독관아!! 나 그냥 인생 역전해보려고 수능 한번 더 보는 것뿐일세! 막 사연 있고 그런 사람 아니야.. 그만 좀 보게나.. '
수능을 마치고 언니 집에 오는 길 역시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버스를 탔는지 택시를 탔는지 걸어서 왔는지 모르겠다. 정신이 들어보니 언니 집에 와있었다. 도착해보니 언니 집은 축제 분위기였다. 내가 수능 시험을 보는 동안 남편이 서프라이즈로 휴가를 내고 딸과 함께 언니 집에 와있었다. 드디어 내 ‘두 번째 수능’이 끝난 것을 모두가 기뻐했다.
그런데..
모두가 즐거운 그날... 난 알고 있었다.
내 두 번째 수능 성적표는 그리 즐겁지 않을 것!이라는 걸...
'이 운수 좋은 날' 이여~이 하얀 후드티여~
대문사진: 홍대 카카오프랜즈 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