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이쪽도 줄여주세요.”
“더 줄이면 불편할 텐데”
스무 살 때라면 매력 뿜뿜 옷태를 위해 수선집을 찾았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사장님 어때요? 치마 줄이고 이 코트를 입으면 임산부 같지 않죠?”
“... 어디 가는데 그래요..?”
1월 2일 아침 댓바람부터 옷 수선집을 찾아다녔다. 신정 다음 날이라 일찍 문을 연 곳이 없어 동네를 한 바퀴나 돌았다. 곧 있으면 임용고시 2차 면접이 있는 날이다. 7개월 된 배가 볼록 나와서 이제 잘 숨겨지지 않는다. 첫째 때는 막달에도 이런 어마 무시한 몸무게가 아니었다. 그런데 둘째 때는 임고생(임용고시생)+임산부 라이프 스타일을 짬뽕하다 보니 하루하루 인생 최대치를 몸무게를 갱신하고 있다.
사실 임용고시 2차 면접에는 ‘외모 점수’ 따위는 없다. 지도안 작성과 수업시연, 그리고 면접을 이틀 동안 치른다. ‘수업을 얼마나 잘할 수 있는지’, ‘교사가 될 자질이 있는지’를 따지는 시험이다. 하지만 면접날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역시 옷과 머리이다. 면접날 입으려고 정장 느낌 나는 임부복을 주문했다. 그리고 지금.. 임부복 원피스의 치마 부분을 줄이고 있다.
둘째 출산 예정일은 3월 22일. 합격하면 3월 2일부터 출근이다. 나는 출근한 지 20일 만에 출산휴가를 가야 된다. 이런 막달의 임산부를 면접관은 뽑아줄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본 결과 결론이 나왔다. 태그도 떼지 않은 새 원피스를 들고 아침부터 온 동네 수선집을 찾아다니게 된 이유가 있다. 최대한 임산부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말이다.
사실 작년에 큰맘 먹고 면접용 검정 정장을 샀지만 0.02점 차이로 떨어졌다. 고급진 그 옷은 이제 겨울철 상갓집 교복이 되었다. 올해 주문한 임부복 원피스는 두 번 다시 안 입어도 좋으니 제발 붙게 해 주세요! 결의에 찬 손놀림으로 불룩한 배를 한 번 쓰다듬고 수선집을 나왔다.
드디어 면접날 수업시연을 하러 들어갔다. 5명의 면접관이 앉아 있다. 5명 모두 검정 옷에 비슷한 머리스타일... 목이 바짝바짝 마른다. 천장에 붙어 있는 난방기의 날개가 정확하게 내 코와 입 쪽으로 조준하고 있다. 20분 수업시연 중 마지막 1분은 쇳소리에 가까운 목소리가 났다. 공들여 줄인 임부복 원피스는 정말 감쪽같았다. 내 배에 시선을 두는 면접관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아차! 임산부인걸 오히려 어필했어야 하나... 치명적인 D라인이 오히려 동정표를 얻을 수도 있었는데... 면접장에서 뒤돌아 나오는데 걸음마다 아쉬움을 뚝뚝 떨어졌다. 또르르..
드디어 최종 합격자 발표날!!
임용고시 주최 측은 도대체 역지사지라는 것을 모른다. 1차 합격자 발표는 12월 26일 크리스마스 다음날이다. 2차 합격자 발표는 최대 명절인 설날 전날로 잡아 놓으셨다. 배우신 분들이 꼭 이런 잔인한 날짜에 합격자 발표를 하신다. 1차 발표 때도 쫄깃한 심장으로 크리스마스 당일에 올나잇을 했다. 작년 설에는 시댁에서 전 뒤집으면서 불합격의 아픔을 삭여야 했다. 올해는 꼭 웃으면서 시댁에 내려가리라!!
딸깍!(마우스를 클릭!)
“김OO, 생년월일”
“최종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하나님! 엄마! 아빠! 정말 감사합니다. 올해는 웃으며 전 뒤집을게요. 시댁도 오늘 당장 내려갈게요! 감사합니다.
난 정말 임용고시에 합격했다. 만삭의 몸이 되어 2월에 합격자 연수를 받으러 갔다. 이제 정말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오리털 파카로도 숨겨지지 않는 D라인이 되었다. 이제 3월에 발령받으면 무슨 옷을 입어야 하나? 그때, 면접 때 입은 임부복 원피스가 떠올랐다.
오늘 아침, 찬바람 맞으며 공들여 줄인 그 임부복 원피스를 꺼내보았다. 헛웃음이 났다. 평생 다시 입을 일이 없어도 그 임부복 원피스를 못 버리겠다. 추억이 있어서.. 내 어설픈 도전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