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서른일곱에 나를 낳아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벌써 40을 훌쩍 넘은 나이였지만 젊은 엄마들 사이에서도 나는 우리 엄마가 제일 예뻐 보였다. 엄마한테는 항상 기분 좋은 분 냄새가 났다.
나는 엄마 껌딱지였고 열성팬이었기 때문에 엄마에 대해 궁금한 것도 많았다.. 그래서 엄마는 꿈이 뭐였는지.. 엄마는 아가씨 때 직업이 뭐였는지.. 엄마하고 아빠하고 어떻게 결혼하게 됐는지.. 아빠는 프러포즈를 어떻게 했는지.. 이런 걸 엄마가 빨래하고 청소할 때 따라다니며 묻곤 했다.
엄마는 땡 시골 출신이다. ‘나는 자연인이다’에나 나올 법한 전라도 산골에서 자랐다. 10대에 갑갑한 시골을 훌쩍 떠난 엄마는 도시에 있는 방직공장 공순이가 되었다. 그때 엄마는 일이 끝나면 벽에다 붙여 논 껌을 다시 씹으며 라디오를 듣는 게 낙이였단다.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배구 선수가 되는 꿈을 키웠었는데 153에서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아 꿈을 포기했다.
공장에는 깐깐한 사감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분이 우리 할머니다. 할머니는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는 다른 소녀들에 비해 감성 충만하고 자유분방한 엄마를 탐탁지 않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감 선생님의 외동아들 이자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우리 아빠가 방학을 맞아 공장에 놀러 왔다. 사내 방송을 들으며 일하는 게 낙인 엄마에게, 아빠는 큐피드 화살 같은 음악을 엄마 마음에 쏘아보려고 공장 방송실의 디제이를 자청했다. 아빠는 사내방송으로 프러포즈를 했고 엄마 아빠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엄마는 나를 양육할 때도 한결같이 소녀감성을 내뿜으셨는데.. 나는 중학교 3학년 긴긴 겨울 방학 동안 피아노 학원과 미술 학원을 다녔다. 다른 친구들은 다들 고입 대비 정석과 성문 종합 영어를 몇 바퀴 돌렸는데 초졸 이후 다시 피아노 학원과 미술학원이라니.. 고등학교에 가면 피아노와 미술을 맘껏 배울 수 없으니 이게 마지막 기회라고.. 전공할 것도 아닌데 예술의 세계로 나를 인도하셨다.
소녀 같은 엄마는 내 직업관에도 큰 영향을 주셨다.
나에겐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언니들이 있다. 첫째 언니는 내가 고1 때 시집을 갔고, 둘째 언니는 고2 때 시집을 갔다. 둘 다 대학을 나왔지만 직장이란 곳에 발도 담그지 않았고 조직의 쓰디쓴 맛 따위는 시식할 시간도 없이 시집을 갔다. 언니들은 대학교 때 알바도 하지 않았다. 아르바이트하고 싶다고 하면 엄마가 ‘그 쪼매난 돈 벌어서 어디다 쓸 거냐 엄마가 줄 테니 힘들게 일하지 말라’고 극구 말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일은 하고 싶으면 하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되는 ‘선택’인 줄 알았다.
셋째 언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다. 지방대 출신이지만 서울로 임용고시를 봐서 합격했는데 그 경사스러운 날 엄마는 축복의 메시지 대신 ‘서울에 보내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유인즉 ‘외지에 절대 과년한 딸을 보낼 수 없다’는 조선시대 같은 발언을 2000년도에 하신 것이다!! 엄마는 정말 절대로 안 보내 줄 것 같았다. 아마 엄마 친구들이 힘써주지 않았다면 언니는 서울 땅을 밟아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 현실감각 제로 & 소녀 감성 엄마를 온몸으로 느끼며 자랐다.
그래서일까 내 직업관도 뜬 구름처럼 둥둥 하늘을 날아다녔던 것 같다. 중학교까지 내 꿈은 현모양처였다. 고등학교 때도 그냥 시집 잘 가는 게 꿈이었다. 앞으로 갖고 싶은 직업 따윈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대학도 그냥 수능 성적에 맞춰 과를 지원했다.
나는 직장이 학교의 연장인 줄로만 알았다. 적절한 양의 노동을 제공하면 살만큼 돈을 쥐어주는 청년 지원사업 정도로 생각했던 것. 그런데 IMF가 터지면서 취업문이 좁아진거다. 졸업하면 100프로 취업하던 시절에서 청년실업자들이 떼거지로 배출되던 시대인데.. 나는 악착같이 취업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학 졸업 후 영어강사로 밥벌이를 하며 취준생으로 혹독한 3년을 보냈다. 그때야 정신을 좀 차렸다.
취준생인 그때.. 사회의 민낯을 처음 보았다. 월급이 밀린 적도 있고 욕 들어 먹고 월급을 떼여본 적도 있다. ‘을’, ‘병’, ‘정’으로 직접 살아보며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곳임을 그때서야 체득한 것이다. 온실 속에 살다 세상의 강펀치를 맞자 그 체감도는 슈퍼 해비급이 되어 날아왔다.
이리 깨지고 저리 깨지고 매집이 늘수록 정규직에 대한 욕망은 점점 불타올랐고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안 풀리는 인생 때문에 날마다 눈물바람을 하며 출근했을 정도로 나는 발을 동동 굴렸는데 엄마는 별로 개의치 않으신 듯했다. 서류전형만 수 십 군데를 떨어져도.. 최종에서 안타깝게 떨어져도.. ‘잘되고 있냐’, ‘붙을 것 같냐’ 이런 말을 입에 올려본 적이 없으셨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나는 10년을 계약직으로 살았고 그와 중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나는 남편과 혼담이 오고 갈 때도 내가 남편 직업에 밀리는 계약직인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직장이 대학교니까 물어보지 않는 이상 절대로 계약직이라고 말하지 않으리라 굳은 결심을 하고 상견례 자리에 나갔다. 그런데 엄마가 불쑥 이런 말을 하시는 것이다.
“우리 딸 OO대학교 교직원인 거 아시죠! 내가 우리 딸을 낳고 어깨 펴고 살아요. 호호 우리 딸이 어렸을 때부터 영민했어요!”
‘응? 엄마? 뭐라고?.. 내가 잘못들은 것일까.. 저런 민망한 말을... 난생처음 엄마 입에서 들었다. 내가 10년째 쭈그리로 사는 걸 아실 텐데...’
난 그때 처음으로 우리 엄마의 소녀감성에 무한 감사를 느꼈다. 나와 내 직장은 나를 계약직이냐 정규직이냐로 분류했지만, 엄마 눈에 나는 '계약직 or 정규직' 카테고리로 인식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