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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구너 Dec 01. 2021

3. 차범근

갈색 폭격기 차붐

 손차박 대전이라고 들어보셨나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축구선수 손흥민과 차범근, 박지성 중 누가 최고냐는 물음입니다. 서로 활동했던 시기나 포지션, 소속팀 등이 달라 제대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대한민국 축구 역사를 저마다 새롭게 쓴 선수들임에는 분명하죠. TV나 인터넷으로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박지성이나 손흥민과는 달리 차범근은 훨씬 이전에 활약했던 선수라 감이 오지 않을 수 있는데요. 두 선수가 프리미어리그에서 화려한 발자취를 남겼다면 차범근은 독일을 제패한 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신경이 남달랐던 차범근은 축구를 포함해 육상이나 핸드볼, 씨름까지 섭렵했다고 합니다. 축구화를 신은 건 중학교 무렵이었는데요. 정말이지 우여곡절이라는 표현이 딱 맞았습니다. 특히 축구에 번뜩이는 재능을 보였던 차범근은 축구부가 있는 중학교를 원했으나 입학도 하기 전에 해체됐거든요. 가난했던 학창 시절이었지만, 축구에 대한 열망이 컸던 그는 부모님의 지원 속에 본격적으로 축구계에 입문했죠.


 이른 출발은 아니었으나 차범근의 활약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다져진 체력도 주요했는데요. 그의 아버지는 훗날을 위해 기초체력 향상에 열과 성을 다했습니다. 체계적인 교육까지 뒷받침되자 기량도 크게 상승할 수 있었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연령별 국가대표팀에 이어 성인 무대까지 문을 두드립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역대 최연소로 국가대표팀에 발탁된 기록이었고요.


 고려대학교와 한국신탁은행, 공군 축구단까지 소속팀의 주전 공격수로서 맹위를 떨친 차범근은 어느덧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선수로 거듭났습니다. 엄청난 속도와 그에 어울리지 않는 유연함은 물론 양발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했죠. 높이에서 강점을 보인 선수는 아니었지만, 다부진 체격을 바탕으로 상대와의 경합에서 따내는 헤딩 역시 주요했고요. 번뜩이는 드리블이나 개인기 역시 훌륭한 타이밍에 선보이며 감탄케 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오늘날처럼 선수의 왕래가 자유로운 편이 아니었습니다. 차범근 이전에도 해외로의 이적 사례가 있긴 하지만, 홍콩에 그친 경우가 전부였거든요. 아시아 내에서의 이동도 쉽지 않았던 시기에 독일에서 차범근을 향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지금과 달리 국가대표팀과 클럽팀의 맞대결이 심심치 않게 펼쳐졌는데 당시 차범근이 대한민국 대표로 좋은 모습을 보여줬기에 가능했죠.


 무엇보다 분데스리가를 향한 차범근의 의지가 강했습니다. 당시에는 독일이 아니라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됐던 시기였는데요. 우연히 독일의 전설 베켄바우어를 보며 선진국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게 생겼습니다. 냉정하게 말해 축구로 경쟁력 있는 나라에서 자신의 기량을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당시 독일뿐만 아니라 갓 창단한 밴쿠버에서도 이적을 제안했지만, 차범근의 확고했던 마음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흔히 차범근이 독일에서 활약했던 클럽으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젠을 꼽을 텐데요. 이전에 잠깐 스쳤던 클럽이 있었으니 바로 다름슈타트입니다. 다름슈타트를 통해 분데스리가의 꿈을 이뤘으며 실제로 데뷔까지 성공적으로 치렀습니다. 다만 군대가 발목을 잡았죠. 복무기간부터 시스템이 지금과 비교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달랐거든요. 전역이라고 생각했으나 추가로 복무해야 한다며 11일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아쉽게도 다름슈타트와의 계약 역시 그대로 끝이 났고요.


 비로소 자신의 꿈에 도달했는데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었으니 얼마나 허망할까요. 허탈감과 공허함에 좌절할 수도 있지만, 차범근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도전에 정해진 나이는 없으며 전역 전까지 좋은 모습을 유지한다면 기회가 또 찾아온다고 생각했죠.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독일에서 보여준 모습도 분명 긍정적이었고요. 5개월 후에 전역을 신고한 차범근은 다행히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계약에 성공하며 다시 독일로 날아갑니다.


 바야흐로 전설의 시작이었습니다. 다름슈타트에서 독일 축구를 경험하긴 했지만, 본격적인 시즌을 치르는 건 처음이었음에도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었거든요. 첫 시즌부터 리그에서만 12골을 폭격하며 팀에서 가장 많은 골을 기록합니다. 지금까지 프랑크푸르트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UEFA컵 우승에도 지대한 공을 세웠죠. 27살의 다소 늦은 나이에 감행한 도전이었지만, 성공적으로 스타트를 끊었습니다.


 차범근의 활약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첫 시즌만 반짝했다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유형의 선수가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반대였죠. 기량까지 점점 발전하며 프랑크푸르트의 공격을 이끌었습니다. 원톱이나 투톱은 물론 상황에 따라 측면까지 소화하는 경기도 있었죠. 경기 대부분을 선발로 출전하며 2년 차 이후에도 16골, 12골과 15골을 기록했습니다. 승승장구했던 차범근과는 달리 소속팀은 재정적인 문제로 진통을 겪었는데요. 팀의 핵심인 차범근에게도 불똥이 튀며 이적을 감행해야 했죠. 뉘른베르크도 접근했으나 최종적으로 레버쿠젠에서 새로운 도전을 이어갑니다.


 유니폼은 달랐지만, 무대가 같아서였을까요. 별도의 적응도 필요 없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 이어 레버쿠젠에서도 연착륙에 성공했죠. 단숨에 주전으로 등극한 그는 첫 시즌부터 리그 모든 경기에 선발로 나와 12골을 넣었습니다. 이미 한국 나이로 30살을 넘긴 선수였는데도 말이죠. 당시 소속팀 감독이었던 데트마어 크라머는 차범근의 영입에 힘입어 레버쿠젠을 상위권으로 도약시키겠다며 기대감을 내비쳤고요.


 득점 행진 역시 프랑크푸르트 시절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았는데요. 3년 연속 리그에서만 10골 이상을 넣으며 꾸준한 기량을 과시했습니다. 차붐 또는 한국에서 온 갈색 폭격기라는 별명이 레버쿠젠 시절까지 줄곧 따라다녔죠. 차붐의 어원은 차범근의 범을 붐으로 표기한 건데 대포가 터지는 소리처럼 그의 폭발적인 결정력과도 어울렸거든요. 말년에는 자연스럽게 활동량도 떨어지고 노쇠화가 찾아오면서 미드필더로 출전하는 경기도 있었습니다. 공격수 중에서도 수비 가담이 뛰어났던 차범근은 익숙하지 않았던 역할까지 충실하게 수행해냈죠.


 10년 동안 독일에서 어마어마한 대기록을 남긴 차범근은 감독으로서 새로운 도전을 이어갑니다. 익숙했던 독일이 아니라 고국인 대한민국에서 말이죠. 지휘봉을 잡은 클럽은 울산 현대 호랑이였는데요. 처음 도전장을 내민 클럽에서 햇수로 4년 가까이 감독직을 맡았지만, 성적이 떨어지자 경질되었습니다. 이후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에 부임해 압도적인 성적으로 월드컵에 진출했죠. 8번의 경기에서 패배는 한 차례뿐이었으니까요. 다만 본선에서의 활약이 처참했던 터라 월드컵 도중 경질되는 불명예를 안았습니다.


 이어진 행보 역시 심상치 않았습니다. 특별한 인연이 없던 중국 무대를 두드렸거든요. 신통한 성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축구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이 돋보였죠. 감독에 이어 도전한 분야는 해설이었습니다. 이미 해설을 전문적으로 하는 해설 위원이 속속 등장했던 시기였지만, 선수 출신으로서 전해줄 수 있는 연륜을 무시할 수는 없었거든요. 서서히 인기를 끈 그의 해설은 호평을 받기에 충분했지만, 재능 넘치는 인재들이 차고 올라와 2014년을 끝으로 잠정 은퇴한 상태입니다.


 중간에 다시 감독직을 수락하며 축구인의 삶을 이어갔는데요. 경험이 쌓인 덕분에 이전에 맡았던 클럽보다는 좋은 성적을 냈습니다. 들쭉날쭉하긴 했지만, 2004년부터 2010년까지 그가 맡았던 수워은 정상에 2번 올랐거든요. 준우승을 차지한 시즌도 있었고, FA컵에서도 우승의 영광을 누렸죠. 다만 감독으로서의 차범근은 호불호가 갈리는 편인데요. 선수로서의 업적은 논란의 여지가 없으나 지도자로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며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차범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존재가 남아있는데요. 바로 차범근 축구교실입니다. 이름부터 친숙한 차범근 축구교실은 그가 선수 경력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와 설립했죠. 형편이 어려운 아동들까지도 외면하지 않으며 축구선수가 꿈인 유망주들을 전격 육성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자신의 이름을 건 축구상을 만들었는데요. 수상한 선수들의 면면이 화려합니다. 박지성이나 이동국, 최태욱부터 아직 현역으로 뛰고 있는 기성용이나 황희찬, 백승호 역시 수상자 출신이거든요.


 현역에서 물러날 법도 한데 2016년에는 U-20 월드컵 조직위원회 부위원장까지 맡으며 행정가로서의 모습도 보여주었습니다. 인생 자체가 축구였다고 해도 충분히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나요? 그의 아들 차두리 역시 대한민국에 획을 그었던 훌륭한 선수였죠. 부자가 대한민국 축구를 위해 공헌한 시간에 심심한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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