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르 체흐의 재림
헤드기어를 쓰고 신들린 선방을 연이어 펼친 체흐의 모습을 기억하시나요? 첼시의 상징적인 수문장이자 200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골키퍼였습니다. 10년 넘게 첼시에서 활약하며 리그는 물론 챔피언스리그와 FA컵까지 굵직한 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경험했고요. 팀에 합류하자마자 주전으로 도약한 그는 한 시즌 최다 무실점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합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골키퍼 개인 최다 무실점 역시 체흐가 세운 220경기로 남아있죠.
첼시에서 체흐의 뒤를 이은 골키퍼는 쿠르트아였습니다. 어린 나이임에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임대 시절 우월한 신체 조건과 동물적인 반사신경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거든요. 금의환향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체흐 이후부터 첼시는 골키퍼 수난 시대를 맞이합니다. 쿠르트아는 4년 동안 주전으로 나서며 여러 영광을 함께 했지만, 결정적으로 충성심이 낮았습니다. 레알 마드리드가 자신을 원하자 공개적으로 이적을 요구하며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었죠.
잡음 끝에 레알 마드리드로 합류한 쿠르트아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당시 프리메라리가에서 준수한 모습을 보인 케파를 골키퍼 역대 최고 이적료로 데려왔습니다. 입단 직후에는 나쁘지 않았으나 2019-20시즌 부진의 끝을 보여주었는데요. 감독과 팬들까지 등을 돌렸고, 대체자로 합류한 선수가 바로 에두아르 멘디였죠.
1년이 흐른 지금까지의 활약만 놓고 본다면 멘디의 이적은 몹시 성공적이었습니다. 불안했던 케파를 대신하여 골키퍼 장갑을 착용한 멘디는 데뷔전부터 안정적인 모습으로 무실점 경기에 일조했죠. 페트르 체흐에 이어 프리미어리그 3라운드까지 무실점으로 막는 훌륭한 기록도 작성합니다. 시즌 도중 램파드 감독이 경질되고, 투헬이 소방수로 긴급하게 투입되었으나 입지에는 변함이 없었고요. 31경기에 출전해 첼시의 리그 4위 수성에 이바지했습니다.
리그에서도 대체로 준수한 모습을 보였으나 하이라이트는 챔피언스리그 무대였습니다. 멘디에게 챔피언스리그는 처음이었지만, 전혀 주눅 들지 않는 모습으로 골문을 든든하게 수호했거든요. 12경기에서 3실점만을 기록했고, 무려 9경기를 무실점으로 이끌었습니다. 선방률은 90%를 넘었죠. 멘디의 활약에 힘입어 첼시는 9년 만에 우승을 이뤘고요. 챔피언스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멘디의 이름이 포함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단숨에 세계가 주목하는 골키퍼로 부상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결과였습니다. 일곱 살에 축구를 시작했던 멘디는 성인이 될 때까지 하부 리그만 전전했거든요. 특출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던 그는 2014년 4부 리그에서도 방출되는 수모를 겪습니다. 다른 구단에서 계속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자 했으나 주전도 아니었던 멘디를 원하는 클럽은 없었고요. 수입이 끊겼기에 막노동과 같은 일을 병행하고, 실업급여까지 받기에 이르렀죠.
무직의 신분이 이어졌습니다. 다행히도 어린 시절 인연이 있었던 르 아브르가 멘디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보수는 없지만, 경기 감각 유지를 위해 함께 훈련을 이어갔죠. 축구선수의 길을 포기하려던 멘디는 마지막으로 1년만 더 도전하기로 다짐합니다. 운명의 시간 앞에서 프랑스의 명문 올림피크 마르세유가 후보 골키퍼를 찾는다는 소식을 접했고, 네 번째 옵션이지만 기적적으로 계약에 성공하죠.
이전과 비교하면 분명 비약적인 행보는 맞지만, 마냥 낙관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골키퍼라는 포지션의 특징 중 하나가 쉽게 말해 철밥통이거든요. 정말 치명적인 실수를 연달아 보여주지 않는 이상 교체가 자주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전 골키퍼가 퇴장이나 부상 등으로 경기에 나설 수 없으면 기회가 주어지지만, 돌아오면 다시 후보로 밀려나고요. 3순위나 4순위는 기약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게다가 마르세유에는 프랑스 국가대표팀에도 단골로 호출되는 걸출한 수문장 스티브 만단다가 있었죠.
당연히 처음에는 존재감이 적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지는 기대감이나 관심은 없었죠. 하지만 멘디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성실하게 훈련에 임하며 묵묵히 자신의 기량을 키웠거든요. 언제인지는 몰라도 기회가 분명 찾아온다고 생각했죠. 가족의 굳건한 신뢰 속에 훈련장에서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자 감독도 멘디를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마침내 명단에 그를 포함했죠.
만단다에게 많은 도움을 받으며 마르세유에서 놀라운 성장을 했지만, 그를 당장 넘어서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본격적인 주전 경쟁을 위해 2부 리그 소속이었던 랭스로 이적하죠. 역시나 처음에는 백업이었으나 7경기에 출전해서 세 번이나 무실점으로 경기를 마무리합니다. 다음 시즌 생에 처음으로 주전이 되어 경기를 소화하는데요. 골문을 든든하게 지키며 소속팀의 2부 리그 우승에 막대한 공헌을 하죠.
승격팀 랭스가 시즌을 8위로 마무리할 수 있는 배경에도 멘디의 활약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일약 스타덤에 오른 그에게 구애가 프랑스는 물론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이어졌죠. 최종 선택은 렌이었습니다. 다소 의외였던 선택에 의아함을 품기도 했으나 여전히 최고의 활약으로 논란을 잠재웠죠. 2020년 첼시에 합류한 멘디는 힘든 시기더라도 꿈을 놓지 않으면 나아질 수 있다고 힘을 주어 말했습니다. 본인을 보고 다른 이들도 그랬으면 좋겠다며 미생들을 응원했고요.
멘디가 첼시의 유니폼을 입은 배경에는 체흐의 안목도 숨어있었습니다. 첼시의 스카우터가 멘디의 활약을 검토할 때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고 하죠. 체흐와 멘디는 공통점도 제법 많은데요. 프로필을 보면 둘 다 196cm의 장신에다가 첼시에 합류하기 전에는 렌에서 뛰었습니다. 첼시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며 소속팀에 빅이어를 선사하기도 했죠. 체흐의 뒤를 이어 멘디 역시 첼시의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