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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Jul 16. 2024

불면증 (4)




     현태는 골목 사이사이를 질주하다시피 달려서 15분 만에 가게에 도착했다. 그의 가게는 대로변에 위치한 7층짜리 주상 복합 건물 1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1층에는 총 3개의 가게가 있었는데 가장 오른쪽의 것이 그의 매장이었다. 이미 도착한 민규는 '손바닥 정원'이라는 간판이 내걸린 가게 앞 화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군용 잠바 깊숙이 고개를 파묻고 있는 20대 중반의 그는 몸매도 탄탄하고 얼굴도 그럭저럭 잘생긴 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호감을 주는 인상은 아니었다. 그것이 매서운 눈빛 때문인지 무성의한 입매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시계를 보니 7시 43분이었다. 늦었지만 이 만큼이라도 시간을 맞춘 것이 다행이었다. 현태는 차에서 내리기 전에 재빨리 입맛을 다시며 입 주위의 근육을 풀었다. 그로서는 오늘 처음으로, 아니 어제 밤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면서 아르바이트생과 간단한 대화를 나눈 이후로 대략 10시간 만에 누군가와 얘기하는 셈이었다.

     “아이고, 이거 미안합니다. 빨리 온다는 게, 저기, 계속 신호등에 걸려서.......”

     현태는 과장된 몸짓으로 차에서 뛰어 나오며 민규를 향해 외쳤다. 민규는 피고 있던 담배를 발로 비벼 끄면서 한 손을 휘휘 젓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렇게 늦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20분이나 기다렸습니다. 너무 안 오셔서 그냥 가려던 참이었어요. 집도 이 근처시라면서 시간 하나 딱 못 지키세요? 저도 시간이 남아 돌아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에요.”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간 민규의 싸늘한 반응에 현태는 적잖게 당황했다. 예전에도 약속에 늦은 적이 있었지만 가벼운 핀잔 한두 마디로 끝났던 것이다. 하긴 민규의 변덕이야 현태도 익히 알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7개월을 꾸준히 만나면서도 민규는 매번 다른 사람 같았다. 어떤 날은 오래된 친구처럼 살갑게 굴다가도 또 어떤 날은 처음 만나는 사이인 것처럼 소원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오늘처럼 딱딱하게 구는 건 처음이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럼 빨리 짐부터 내립시다. 바쁘신 것 같은데.”

      현태는 애써 말투를 누그러뜨리며 앞장서서 민규의 화물차로 다가갔다. 민규는 입을 꾹 다문 채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빨간 고무가 입혀진 목장갑을 꺼내 손에 끼고는 쇠파이프로 틀을 짜서 천막을 덮은 화물차의 입구를 열어 재꼈다. 화물차 안에는 2m쯤 되는 벤자민고무나무, 테이블 야자, 관음죽, 산세베리아 등등의 관엽 식물부터, 주황색 꽃이 핀 군자난이며 심비디움, 호접란 등의 각종 난들과, 검은색의 작은 플라스틱 포터에 담긴 시클라멘, 팬지, 아프리칸 바이올렛, 수선화 등이 꽉 들어차 있었다. 또 한쪽 구석에는 장미, 안개꽃, 국화, 백합, 거베라 등의 생화들도 다발로 묶여 종이상자 안에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민규는 그 중에서 '문래동'이라고 쓰인 노란색 딱지가 붙어 있는 것들만 골라 화물차 밖으로 옮겼다. 커다란 몬스테라 화분 2개와 군자란 화분 3개, 아레카 야자 화분 2개, 아이비, 카랑코에, 시클라멘 포터가 가득 들어있는 상자 1개, 노란색과 붉은색 장미, 그리고 흰색 백합꽃이 다발로 들어있는 종이상자 4개가 화물차 밖으로 내려졌다. 

     일하는 중에도 민규는 내내 말이 없었다. 고작 10분 정도 늦었다고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니 현태도 슬슬 화가 치밀었다. 누가 뭐래도 현태는 물건을 사주는 고객이었고 민규는 그가 거래하는 도매상의 배달 직원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도리어 자신이 주눅이 든다는 건 아무래도 합당하지가 않았다. 그러나 약속시간에 늦은 건 어쨌든 현태의 잘못이었고 꼭 집어서 지적할 만큼 민규의 태도가 불손한 것인가 하는 것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어서 그는 묵묵히 참을 수밖에 없었다. 

     화분과 꽃을 모두 가게 안으로 옮기고 나자 민규는 바지에 붙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그대로 돌아서려 했다. 그런 민규를 현태는 가게 안으로 끌고 가서 소파에 앉힌 다음 사과 주스 캔을 건넸다. 

     “저기, 수고 했는데 이거 마시고 가요.”

     “아뇨. 아닙니다.”

     “마시고 가요. 이대로 가면 내가 미안해서 그래요.” 

     민규는 겸연쩍은 듯 잠깐 망설였지만 곧 두 손으로 주스 캔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장갑을 다시 뒤춤에 꽂아 넣고는 캔 뚜껑을 따서 입으로 가져갔다. 현태는 민규가 주스를 들이키는 모습을 곁눈질로 지켜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은 부당한 대접을 감내하면서 오히려 상대방을 감싸 안는 관대함이나 상냥함이 아니었다. 반대로 상대방에게 화가 났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업신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감쪽같이 숨기고서 상대방의 면전에 대고 천진하게 웃음 짓는 고약한 악의였다.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비굴해지면서까지 자기만족으로 점철되는, 복수라고 하기에는 명쾌하지 않은 앙갚음이었지만 그래도 현태는 속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그 때 말없이 주스만 들이켜던 민규가 불쑥 말을 꺼냈다. 

     “저기, 저 오늘까지만 일합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거 참, 그게, 저 오늘 부로 잘렸거든요.”

     “잘려요?”

     “여기 오는 길에 사장한테서 문자를 받았어요.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민규는 날카롭게 헛기침을 하더니 가슴팍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가게 안에서는 금연이었지만 현태는 제지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해고당한 이유를 물어봐야 하는 건지, 아니면 곧 더 좋은 직장을 구하게 될 거라고 위로부터 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팔짱을 낀 채 그저 ‘아니’, ‘어이구’, ‘참’ 같은 추임새만 반복 하고 있었다. 민규는 담배를 두어 번 깊게 빨아들이고는 먹던 주스 캔에 재를 털어내며 욕지거리를 했다. 사실 그것은 말을 한다기보다는 계속 목에 걸려있던 것을 담배 연기와 함께 토해내는 것 같았다.

     “씨발, 내가 오랜 산건 아니지만 살다 별 거지같은 일을 다 당해보겠네. (그는 침이라도 뱉을 것처럼 입술을 찡그렸지만 침을 뱉지는 않았다.) 오늘 아침에 회사에서 만났을 때도 사장은 제게 아무 말도 안했어요. 그냥 인사하고, 커피 마시고, 평소와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구요. 그런데 트럭에 물건을 싣고 출발한 지 한 20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문자가 날아오는 겁니다. 보니까 내일부터 회사에 나오지 말래요. 당장 내일부터요. 세상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나. 자아, 이거요. 사장이 보낸 문자 좀 보세요.”

     현태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민규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몇 번 누르더니 그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핸드폰 액정에는 '미안하지만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세요 이번 달 월급은 오늘 일 끝내면 통장에 넣어줄게요 그 동안 수고했어요'라고 쓰여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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